대중화되면 “세상의 혁신에 동참” 구매 심리로 시장에 큰 변화 몰고올 듯
“차를 구입해 주신 분들, 테슬라 연구진들, 행사에 참석하신 분들 모두 좋은 밤 되길 바랍니다.” 지난 9월 29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프리몬트에 있는 테슬라 공장에서 열린 테슬라모터스의 신형 전기차 SUV ‘모델X’ 출시행사장. 엘론 머스크 회장(44)의 마무리 발언에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고, 테슬라 SUV 첫 구매자들은 들뜬 표정으로 양도받은 차를 타고 행사장 무대를 떠났다. 이날 행사는 인터넷으로 생중계됐다.
기시감이 든다. 8년 전, 2007년 1월 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맥월드 행사장.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는 이런 말로 서두를 열었다. “우리는 오늘, 혁신적인 제품을 무려 세 가지나 선보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와이드스크린’ 아이팟(mp3)입니다. 둘째는 혁신적인 휴대폰입니다. 셋째는 획기적인 인터넷 통신기기입니다. 아이팟, 휴대폰, 인터넷… 뭔지 감이 오나요? 이것들은 각각의 3개 제품이 아닙니다. 단 하나의 제품입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제품을 ‘아이폰’이라고 부릅니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의 등장으로 휴대폰이 재발명(re-invented)되었다고 선언했다. 지금도 유튜브를 통해 볼 수 있는 이 영상에 지난 7월 한 사용자가 댓글을 달았다. ‘인류의 역사가 바뀐 그 순간….’
테슬라 전기차, 자동차 재정의 모멘텀?
분명히 고 스티브 잡스와 테슬라모터스를 이끄는 엘론 머스크의 프리젠테이션 스타일이나 개성은 달랐다. 엘론 머스크는 스티브 잡스처럼 농담도, 다른 회사의 제품에 저주를 퍼붓지도 않는다. 폭스바겐의 배기가스 조작 스캔들은 친환경 전기차를 선전하는 데 써먹을 수 있는 호재였지만 이날 프리젠테이션에서 머스크는 직접적인 비난을 하지 않았다.
테슬라 측이 이날 밝힌 ‘모델X’차의 스펙은 5도어에 6개 내지 7개의 시트가 있는 풀타임 사륜구동(AWD) 방식 전기차다. P90D 모델의 경우 구동은 90㎾ 전기모터로 이뤄지는데, 1회 충전 주행거리는 250마일(약 402㎞)이다. 시속 60마일(시속 약 96㎞)에 도달하는 시간은 3.8초이며, 최고속도는 시속 155마일(시속 약 249㎞)이다. 이 성능은 기존 출시된 내연기관 차 중에서는 슈퍼카로 언급되는 ‘포르쉐911 터보’에 근접하는 수준이다.
여기에 뒷좌석 문이 위로 열려 좁은 곳에서도 쉽게 타고 내릴 수 있는 팰콘윙식 도어, 헬리콥터 조종석을 닮은 넓은 운전석, 차주가 다가서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문 등도 이 차의 특징이다. 총 5대가 팔린 이 ‘시그니처 에디션’의 가격은 대당 1억5500만원 선. 테슬라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테슬라 충전소에서 약 30분을 충전하면 시속 60마일(96㎞)로 3시간을 달릴 수 있는 전기를 보충할 수 있고, 가정용 120, 240V로 충전도 가능하다. 현재 북미와 유럽, 일본 등 407곳에 만들어진 충전소의 지붕에는 태양광 패널이 달려 있다. 이날 행사의 영상도 유튜브에 올랐다. 훗날, 이 영상에 대해서도 “인류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과 같은 댓글이 달리게 될까.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주동력원이 내연기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강정수 디지털사회연구소 소장의 말이다. 강 박사에 따르면 자동차와 관련된 특허의 70~80%가 내연기관에 집중된다. “종전까지 자동차의 동력구동 장치의 핵심 원리는 내연기관의 폭발을 동력으로 전달하는 장치다. 내연기관 기술력의 핵심은 이 ‘폭발’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동력으로 변환시키느냐에 달렸다. 사실 이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나 나라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복잡한 내연기관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전기모터가 대신하는 것이다.” 그 함의는? 자동자 제작에서 기술적 진입장벽이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고 강 박사는 말한다. 그는 IBM PC가 등장하던 상황에 비유해 설명했다. “그 전까지 PC의 역사가 기업이 혼자 PC를 만들었다면 IBM은 플랫폼을 개방해, 인텔이라는 작은 회사에 CPU 외주를 줬다. 다시 조립은 한국이나 대만 업체들에 맡기고….” 그리고 개인용 컴퓨터, PC의 시대가 열렸다. 내연기관의 기술력 우위가 사라진 자동차의 생산에서 중요한 것은 디자인이나 소프트웨어로 넘어갈 것이라는 것이 강 박사 주장의 요지다. “그리고 테슬라 전기차의 출현으로 드디어 그 전환의 모멘텀이 왔다.”
전기차 한계 거의 극복돼
그동안 전기차의 한계로 지적되어 왔던 것들은 테슬라의 전기차가 상용화되면서 거의 극복되었다. 흔히 지적되었던 배터리의 경우 테슬라는 일본기업 파나소닉과 협조관계를 맺어 노트북용 18650 리튬이온배터리를 패키징해 사용한다. 실제 이 배터리를 보면 AA건전지보다 약 1.2~1.5배 정도 큰 건전지처럼 생겼다. 테슬라 자동차 한 대당 6831개의 파나소닉 배터리가 들어간다. “사실 테슬라 측에서 우리도 접촉해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배터리를 생산하는 LG화학 관계자의 말이다. “테슬라와 파나소닉 간의 밀월엔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다. 당시 파나소닉은 니켈수소전지의 기술을 완성했고, 리튬 이온 쪽의 기술을 보완하고 싶어했다.” 이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LG화학이나 SK이노베이션, 삼성SDI 등 한국 업체들도 ‘테슬라가 이 방식을 고집한다면’ 당장 생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테슬라가 2020년 즈음엔 50만대 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 시점에는 지금의 능력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쪽에도 요청이 들어올 것으로 보인다. 그런 부분에 대한 대비는 하고 있다.”
전기차에 대해 흔히 나오는 비판이 ‘친환경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화석연료를 때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른바 ‘긴 배기관의 역설’로 알려진 문제다. 엘론 머스크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도 장문의 반박을 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석탄을 태우는 것 자체는 가솔린보다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지만 전기자동차는 뛰어난 효율성 때문에 설령 100% 석탄을 태워 전기를 발생하더라도 내연기관보다 탄소배출량이 적다는 것이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자회사 솔라시티의 사업분야인 태양광 등 다른 친환경 에너지원으로 화석연료를 100%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야심이다.
사실, 이번에 내놓은 ‘모델X’는 대중차라기보다 럭셔리카로 봐야 한다. 강 소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어차피 연구개발비 등을 고려하면 시작은 럭셔리카일 수밖에 없다. 독일의 경우 테슬라 차를 구입하는 사람은 기존의 포르쉐 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테슬라는 정확히 그 지점을 파고드는 것이다. 과거 아이폰을 산 사람들이 갖는 ‘세상의 혁신에 동참하고 있다는 느낌’과 같은 것이다. 트렌드세터들이 전기차를 몰고 거리를 다니면 다음으로 대중시장이 요동칠 것이다.” 엘론 머스크 자신도 “최종 목표는 대중 시장”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게다가 값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복득규 삼성경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전기차의 사업단계별 수익률 분포는 스마일커브의 형태로 나아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즉 기존 자동차사업의 수익률 분포는 개발시험제작 단계에서는 낮다가 부품→조립 단계에서 정점을 찍은 뒤 판매와 애프터서비스 단계에서는 낮아지는 ‘역스마일 커브’를 그리는 데 비해, 전기차는 조립단계에서 수익률이 가장 낮은 대신 판매와 애프터서비스에서 높아지는 형태일 거라는 것이다.
“분명 비싼 장난감 수준은 아니다. 굉장히 잘 만든 차인 것은 사실이고 가격만 배제하면 시장을 선도할 것은 사실일 것이다. 테슬라모터스가 관심을 받은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이미 업력은 10년이 넘은 회사다. 다른 회사들이 그것을 뛰어넘으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기존 자동차업계 사람들이 그만큼 관심을 가질지는 모르겠다.” 김범준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의 말이다. 기본적으로 자동차는 휴대폰과 같은 경소단박형이 아닌 중후장대형 사업이기 때문에 사실상 정보기술(IT) 벤처회사에 가까운 테슬라모터스의 움직임에 기존 완성차 업체들이 큰 문제의식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2007년 상황을 떠올린 이유는 이 때문이다. 휴대폰을 재정의하는 아이폰이 발매했지만, 한국에는 2년간 출시되지 않았다. 출시 당시 취재하면서 기자는 LG전자의 모바일부문 고위 관계자로부터 “(스티브 잡스는) 혁신이라고 하지만 터치스크린도 우리는 이미 다 해본 기술이고 새로운 기술은 아니다”라는 속내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비슷한 반응을 보였던 삼성은 글로벌 시장에서 피처폰이 아직 잘 나가고 있었음에도 애니콜-옴니아를 접고 갤럭시 시리즈를 내놔 스마트폰 시장의 포션을 선점할 수 있었다. 익명을 요청한 한 민간 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휴대폰의 경우 삼성·LG·팬텍 등 유수의 업체가 경쟁하고 있었고, 통신사도 경쟁체제였다. 아이폰의 도입도 만년 2위였던 KT의 도발로 시작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자동차는? 사실상 현대·기아차 독점시장 아닌가.”
테슬라뿐 아니다. 애플이나 구글도 자동주행차를 필두로 자동차산업에 뛰어들 것을 선언했다. 심지어 차량공유서비스 업체인 우버도 최근 자동차 제작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밝혔다. “테슬라가 자기들이 보유한 특허를 공개한 이유가 뭐겠느냐. 전 세계적으로 투자자를 끌어모으는 것도 목적이지만 마켓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다.” 산업분석평론가 심정택씨의 말이다. 그는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과 현대차의 위기를 다룬 책 <삼성의 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를 펴냈다. “현대·기아차는 혁신의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이미 중국 현지공장에서 현대차 판매대수의 급감으로 표면화되고 있다.” 심씨가 책들에서 주장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갤럭시 시리즈와 같은 전자산업 카테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삼성의 위기는 곧 가시화된다. 대신 한국 경제를 떠받쳐줘야 하는 것은 현대·기아차인데, 현기차의 위기도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은 지금까지는 비교적 훌륭했다고 본다. 문제는 앞으로다. 정의선 부사장이 승계하는 체제가 될 텐데, 삼성이 이건희 회장의 유고 이후 이재용 후계체제 구축에 매달리면서 자기혁신이 지체되는 것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까 우려된다.”
현기차 독점 한국 상황은 어떨까
현기차 쪽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현기차 관계자의 말이다. “전기차뿐 아니라 수소연료전지차, 하이브리드 카 등 미래차 부분에 2020년까지 82조원을 투입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시장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모두 다 기술을 축적하며 시장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변양규 현대경제연구원 거시연구실장은 “결국 미래자동차에서 핵심은 환경과 에너지효율 문제가 될 것은 확실하다”며 “중요한 것은 룰의 셋업인데, 현대·기아가 지금까지 강점을 가진 것은 수소연료전지 분야여서 그쪽으로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핵심은 전기차의 대중시장이 어디서 먼저 열리느냐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휴대폰처럼 그 무대는 중국이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전기차 정책은 사실 정치적으로 결정된다. 대선국면에 접어 들어간 미국에서 테슬라의 전기차는 ‘오바마 차’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주로 우익진영으로부터다(사실 미국 에너지부의 전기차 지원대출 프로그램 등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부시 행정부 때였다). 강정수 연구원은 전기차 제조의 진입장벽이 낮아진 만큼 아예 규제를 풀어 각 기업이 경쟁적으로 시장에 진입하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현대·기아차만 아니라 현대중공업, 두산중공업, 한화, 삼성, 심지어 네이버나 카카오도 다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한국은 배터리도 잘 만들고 소프트웨어 기술도 전혀 없는 나라는 아니다. 지금처럼 독점구조로 유지된다면 과거 아이폰 사태 때처럼 한순간에 한국의 자동차산업도 훅 갈 수 있다. 차기 대선후보로 나올 사람이 공약으로 풀 문제가 아닐까.” 정부는 어떤 입장일까. 정부 발표자료를 보면 전기차와 관련해서는 지난해 12월에 낸 ‘전기자동차, 2015년부터 상용화 시대 기반 조성’이라는 제목의 자료가 가장 최근 자료다. 자료를 보면 보조금과 보급차량 다변화정책, 공공·급속 충전시설 확충은 환경부가 맡고, 세제는 기획재정부와 행정자치부가, 전기차 식별표시 및 사업등록은 산업통상부와 국토교통부 등으로 나뉘어 있다. 관련 부처 정비가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