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ISD는 국제사회 ‘재고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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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FTA에 포함되는 것 반대… 한·미 재협상은 올해도 물 건너가나

독일 정부가 유럽연합(EU)과 캐나다 간 자유무역협정(FTA) 투자 장(章)에 투자자-국가소송제(ISD)가 포함되는 데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EU와 미국 간 FTA의 ISD에 반대한 데 이어 캐나다와의 FTA에서도 같은 입장을 취한 것이다. ISD는 외국인 투자자가 투자 유치국의 법령·정책으로 피해를 입은 경우 국제 중재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한 제도로, 한·미 FTA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혀 왔다. 국가의 공공정책이 외국인 투자자들에 의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로이터 통신은 7월 26일(현지시간)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을 인용해 “독일 정부는 ISD를 포함하는 투자자 보호 조항이 필요하지 않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독립적인 자국 사법 시스템이 있는데 굳이 외국인 투자자에게 독일 정부를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와 같은 ‘자본의 법정’에 세울 수 있는 권한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ISD가 논란이 됐던 지난 2011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의원들에게 배포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 설명 자료 | 박민규 기자

ISD가 논란이 됐던 지난 2011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의원들에게 배포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 설명 자료 | 박민규 기자

공공정책 침해 국제사회 우려 커져
그동안 ISD가 포함된 양자 간 투자협정을 맺어온 독일 정부가 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요인 때문으로 보인다. 가장 큰 요인은 스웨덴 국영 에너지 기업인 바텐팔이 2011년 독일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독일 정부는 17개의 모든 원전을 2022년까지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바텐팔이 소유·운영해온 2개 원전은 문을 닫게 됐고 바텐팔은 10억 유로의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독일의 원전 폐쇄정책과 같은 국가의 공공정책이 ISD 대상이 된 것을 두고 “ISD가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요인은 EU·캐나다 FTA에 ISD가 포함되면 EU·미국 FTA에도 ISD가 들어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앞서 독일, 프랑스 등 EU 일부 회원국은 ISD가 다국적 기업에 유리한 제도이며, 공공 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는 명분을 들어 EU·미국 FTA에 ISD가 포함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유럽 내부에서는 “EU·캐나다 FTA는 현재 교착상태에 있는 EU·미국 FTA를 위한 시험용”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ISD가 껄끄러운 독일로서는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예전과 달리 ISD가 투자자 편향적이며 국가 공공정책을 침해할 수 있다는 국제사회의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한·미 FTA ISD 재협상은 감감 무소식이다. 정부는 당초 올해 안에 미국과 협의를 시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해 통상기능이 외교부에서 산업부로 이관된 이후 “실물경제 측면에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며 재협상을 연기했기 때문에 올해엔 시작을 하겠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하지만 아직 미국과 구체적인 협의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올해 안에 ISD 재협상은 물 건너갈 가능성이 커졌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세운 전략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투자 장에 들어갈 ISD를 미국에 근거로 내세우겠다는 것이다. TPP에는 개발도상국부터 선진국까지 12개 회원국이 참여하고 있는 만큼 양자 간 FTA에 비해 ISD 수준이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2012년 6월 미국 시민단체인 ‘퍼블릭 시티즌’이 입수해 공개한 투자분야 초안을 보면 호주는 TPP에 포함된 ISD의 적용을 받지 않기로 했다. 현재까지 이 내용이 유지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지난해 9월 호주 정권이 노동당에서 보수 성향의 자유·국민당 연합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권교체 뒤 호주는 한·호주 FTA에는 ISD를 넣었고, 올해 일본과 체결한 FTA에서는 ISD를 넣지 않았다. 분명한 점은 호주처럼 ISD에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접근하는 국가가 있으면 높은 수준의 ISD를 TPP에 새겨넣긴 어렵다는 것이다.

지난해 통상 전문가인 남희섭 변리사(오른쪽)가‘한·미 FTA 발효 1년 평가 토론회’에서 투자자-국가소송제(ISD) 재협상에 대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

지난해 통상 전문가인 남희섭 변리사(오른쪽)가‘한·미 FTA 발효 1년 평가 토론회’에서 투자자-국가소송제(ISD) 재협상에 대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

TTP와 연계로 재협상 계속 늦어져
12개 회원국이 ISD의 준거법으로 협정문뿐 아니라 국내법도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초안은 ‘국제 중재 재판부는 협정문과 적용 가능한 국제법 조항에 따라 판결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한·미 FTA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뒤에 ‘가능할 경우 분쟁 당사국의 국내법도 적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 추가돼 있다. 이 문구는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일부 회원국의 제안으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준거법에 국내법이 포함되면 ISD의 위험성이 다소 완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TPP 협상 연내 타결이 사실상 어려워지면서 정부는 연내 미국과 ISD 재협의를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7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TPP 수석대표 회의가 성과 없이 마무리된 데다 주도국인 미국이 11월 중간선거 등을 이유로 협정 타결을 밀어붙이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TPP 협상에서 ISD 부분이 확정되지 않았다”며 “하노이에서 9월에 열릴 TPP 관련 협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TPP의 ISD 내용이 아직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한·미 FTA ISD를 고치겠다고 나서면 미국도 받아들이기 어렵고 우리 입장도 약해진다”고 설명했다.

이해영 교수는 “ISD에 대한 국제사회의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통상관료들은 한·미 FTA ISD를 바이블처럼 여기며 방어하려고 한다”며 “이런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재협상이 이뤄지긴 어렵다”고 말했다.

<김지환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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