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앤로스, BR 시리즈-항공기 계기판 닮은 파일럿 시계의 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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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시계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밀리터리 워치(군용 시계)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대적인 손목시계 형태가 등장하게 된 계기도 군인들이 치열한 전장에서 보다 쉽게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용도로 고안된 것이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발발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그런 맥락에서 손목시계의 도래와 발달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셈이다. 당시의 공군 파일럿 장교들이 주로 착용하던 큼지막한 사이즈의 시계가 생사와 직결된 작전 필수품이었다면, 20세기 중·후반에 등장한 파일럿 시계들은 실제 조종사를 위한 용도라기보다는 파일럿 시계 특유의 멋에 매료된 소시민 애호가들을 위한 시계라고 할 수 있다.

올해로 창립 22주년을 맞은 벨앤로스(BELL & ROSS)는 개성 강한 파일럿 시계를 제조하는 브랜드로 유명하다. 전통적인 파일럿 명가인 IWC나 브라이틀링에 비하면 한참 후발주자이지만 벨앤로스는 이들 선배 못지않은, 오히려 훨씬 대범한 디자인의 현대적인 파일럿 시계를 선보여 단기간에 두꺼운 마니아층을 거느리게 되었다.

30개 한정 제작된 BR 미뉴테르 투르비용 핑크 골드 모델

30개 한정 제작된 BR 미뉴테르 투르비용 핑크 골드 모델

커다란 정사각형의 대담한 디자인
프랑스 태생의 시계 디자이너 브루노 벨라미크는 어릴 적부터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은 꿈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진로의 갈림길에서 그는 결국 파리 국립 산업디자인학교에 진학한다. 이후 휴학과 함께 돌연 군대에 자원한 그는 뉴칼레도니아에서 2년여간의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독일의 시계 브랜드 진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게 된다. 진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실제 파일럿 출신 헬무트 진이 창립한 브랜드로 군 특수부대원들이나 탐험가들이 애용하는 튼튼하고 남성적인 디자인의 시계를 만드는 제조사로 명성이 높았다. 밀리터리 시계에 깊게 매료된 벨라미크는 진에서 시계 디자인은 물론 시계 제조의 전반적인 사항들을 배우게 되었고, 이러한 경험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사업가인 카를로스 A 로질로와 만나며 새 회사의 창업으로까지 이어졌다. 벨앤로스라는 브랜드명 또한 이 두 사람의 각 성 앞부분을 따서 만든 것이었다.

파리에 본사를 둔 벨앤로스는 창립 초반에는 디자인과 마케팅은 프랑스에서 하고, 시계 제조는 독일 진에 의뢰해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진과의 파트너십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고, 벨앤로스는 2002년 스위스 라쇼드퐁에 첫 매뉴팩처를 건립하면서 본격 시계제조사로 거듭난다. 그리고 1970년대 항공기 조종석에 부착된 시계에서 착안한 애비에이션(Aviation) 컬렉션 BR01을 2005년에 발표한다.

애비에이션 컬렉션의 등장 이전에도 벨앤로스는 우주 탐사 미션을 기념한 스페이스 원이나 수심 1만1100m 방수 기능으로 1990년대 후반 세계 신기록에 등재된 하이드로맥스 같은 인상적인 시계들을 선보여 왔다. 하지만 커다란 정사각형 케이스의 BR01 시계의 등장만큼 강렬한 인상은 주지 못했다. 항공기 칵핏(조종석) 계기판에서 그대로 떼어다 만든 것만 같은 BR01 시리즈는 특유의 대범한 디자인으로 2005년 바젤월드에서 큰 화제를 모았고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벨앤로스를 시계업계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만들었다.

가독성, 기능성, 정확성, 그리고 100m 방수 기능을 강조한 애비에이션 컬렉션은 사이즈가 큰 시계를 선호하는 현대의 젊은 남성들과 기존에 없던 독특한 스타일의 파일럿 시계를 원하는 이들에게 특히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후 2006년에는 사이즈가 좀 더 작아진 지름 42㎜의 BR03 시리즈와 지름 39㎜의 쿼츠 사양의 모델들이 추가돼 인기를 이어갔으며, 이듬해인 2007년에는 BR01 라인에 브랜드 최초의 투르비용 모델까지 발표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 밖에도 프랑스 엘리트 경찰특공대와 공군 장교들을 위해 특수 제작한 한정판을 비롯해, 2009년에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공수부대 에어본을 기념해 에어본의 상징인 해골을 다이얼에 그대로 형상화한 BR01 에어본(999개 한정)과 BR01 에어본 투르비용(20개 한정) 같은 이색적인 모델들까지 추가하며 마니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다. 또한 BR01 에어본 모델을 바탕으로 다이얼과 베젤에 다이아몬드를 화려하게 세팅한 각 99개 한정의 에어본 415와 672 모델로도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2011년에는 실제 관제 레이더 시설에서나 볼 수 있는 회전 디스크 형태의 다이얼을 가진 BR01 레이더와 BR01 컴퍼스를 추가해 파일럿 시계의 외연을 한 차원 넓혔다는 평을 듣는다. 한편 정사각형 케이스의 BR 시리즈 외에 부드럽게 마감된 원형 케이스의 빈티지 BR 시리즈와 1차·2차 세계대전 당시의 초창기 군용 파일럿 워치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의 빈티지 WW1과 WW2 컬렉션을 차례로 발표해 가장 다채로운 파일럿 컬렉션을 자랑하는 브랜드로 성장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 BR 시리즈에 플라이백 기능의 타이머와 투르비용을 접목한 핑크 골드와 티타늄 케이스로 각각 30개씩 한정 제작한 BR 미뉴테르 투르비용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2012년과 2013년에는 항공기 계기판에서 실제로 볼 수 있는 자이로컴퍼스(회전 나침반), 승강계, 고도계, 속도계 등을 그대로 기계식 손목시계 형태로 응용한 6종의 BR01 시리즈를 추가해 주목을 받는다. 이들 시계에는 그 이름조차 ‘비행용 전문기기’라고 명명됐을 만큼 벨앤로스의 항공 시계 실험이 극에 달한 결과물들이라 하겠다.

2014년 신제품, BR03-94 카본 오렌지

2014년 신제품, BR03-94 카본 오렌지

잇딴 이색적 모델에 마니아들 열광
그리고 올해 바젤월드에서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한 프랑스의 전설적인 파일럿 조르주 귀네메르에 헌정한 500개 한정의 WW1 귀네메르 시계와 BR03 기존 스틸이나 블랙 PVD 처리된 스틸, 골드 케이스 대신에 블랙 세라믹을 사용한 모델들을 다수 발표했다. 또한 티타늄 케이스의 전면부가 위로 뚜껑처럼 열리는 독특한 형태의 투르비용 시계, WW2 밀리터리 투르비용도 선보였다. 이 시계는 과거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디자인을 계승한 것으로 총 20개만 한정 제작됐다.

이 밖에도 1960년대 미국의 항공기와 할리 데이비슨 고유의 모터바이크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은 B-로켓 시리즈도 올해 첫선을 보였다. 역시 벨앤로스의 수석 디자이너인 브루노 벨라미크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컬렉션으로, 기존 애비에이션 시리즈의 뚜렷한 개성에 모터스포츠의 매력을 더한 참신한 시도가 돋보였다.

파일럿 시계를 표방한 브랜드는 많지만 벨앤로스처럼 대범하고 치열하게 파고든 예도 드물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파일럿 시계 분야에서 벨앤로스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특별하다. 역사는 짧지만 처음부터 자신들이 걸어야 할 길을 분명하게 간파한 결과다. 설립자 브루노 벨라미크는 비록 어릴 적 조종사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벨앤로스를 통해 그리고 그가 디자인한 다채로운 파일럿 시계들을 통해서 하늘을 나는 조종사의 마음을 대리 충족할 수 있게 되었다. 벨앤로스의 시계에 열광하는 전 세계의 수많은 팬들 역시 이와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장세훈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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