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진, 린드버그 아워 앵글 - 항법용 방식 손목시계에 최초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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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1903년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기를 제작·비행하는 데 성공한 이래 인류의 항공사는 새 국면을 맞이하는데, 흥미롭게도 항공사의 발전과 손목시계의 역사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앞서 소개한 최초의 손목시계 ‘까르띠에 산토스’가 애초 브라질 태생의 조종사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을 위해 제작된 것 하며, 1·2차 세계대전 당시 군 소속 파일럿들에 의해 손목시계가 점차 보편화되기 시작한 점, 시간 확인은 물론 경도까지 측정할 수 있는 내비게이션(항법) 기능의 시계들이 제작된 점들은 모두 보다 안전한 비행을 염원한 조종사들의 요청을 반영한 데서 유래했다.

스위스 상티미에를 근거지로 창립 180여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론진(Longines)은 20세기 초 항공사의 기념비적인 순간들을 함께한 대표적인 명문이다. 19세기 후반까지의 론진은 정밀한 회중시계용 크로노미터 제작사로서 세계 만국박람회의 그랑프리를 독식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론진을 상징하는 날개 달린 모래시계 심벌과 브랜드명이 스위스 연방 지적재산권 관리사무소(현 세계지적재산권기구)에 공식 등재된 것 역시 19세기 말의 일로, 시계 브랜드로는 최초로 브랜드명·로고·심벌을 등록한 회사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그만큼 창립 초창기부터 매우 진취적인 행보를 과시했던 론진이다. 20세기에 들어서는 혁신적인 기능의 크로노그래프 시계들로 경마를 비롯한 각종 경주대회의 타임키퍼로 활약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린드버그가 직접 설계한 시계도면 원본

린드버그가 직접 설계한 시계도면 원본

모험가 린드버그와의 기술협약으로 탄생
론진은 또한 20세기 초에 이미 현대적인 통합·분업형 매뉴팩처 체제를 구축해서 대량생산이 가능했던 규모가 큰 기업이었다.

1919년 론진은 시계제조사로는 최초로 국제항공협회의 공식 납품업체로 발탁된다. 당시 론진의 비행용 시계는 조종석에 부착이 가능한 형태였고, 그 기능성과 높은 정밀성 덕분에 군용으로 특히 수요가 많았다. 그리고 1927년에는 미국의 해군장교 필립 반 혼 윔즈가 개발한 항법시스템을 응용해 다이얼 내부의 디스크가 회전하며 라디오 시간 시그널과 동조하는 독특한 기능의 손목시계를 발표해 주목을 받는다.

한편 1927년은 미국의 조종사 찰스 린드버그가 뉴욕에서 파리까지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라는 단엽기를 몰고 최초로 무착륙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역사적인 해이기도 했다. 총 비행시간 33시간 30분이라는 당시의 기록을 측정한 시계 역시 다름 아닌 론진의 그것이었다.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 린드버그 덕분에 론진의 시계 역시 자연스레 더욱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당시에는 지금처럼 홍보대사라는 개념이 없었음에도 론진의 지면광고 속에는 린드버그의 사진이나 대서양 횡단 관련한 기사 내용과 함께 시계가 소개되는 사례가 많았다.

린드버그는 이후의 여러 비행에서도 론진을 선택했고, 나아가 자신이 비행시 꼭 필요하다고 느꼈던 기능들을 담은 시계를 제작하기 위해 직접 의뢰하기에 이른다. 

필립 반 혼 윔즈의 제자이기도 했던 린드버그는 윔즈로부터 배운 항법시스템을 한 차원 발전시켜 보다 편리하게 비행시각과 경도를 확인할 수 있는 시계를 개발하고자 골몰했다. 그의 아이디어와 드로잉을 바탕으로 론진에 의해 1931년 처음 세상에 발표된 시계가 바로 린드버그의 이름을 딴 ‘린드버그 아워 앵글’(Lindbergh Hour Angle)이다.

1930년대 초반 제작된 초창기 린드버그 아워 앵글 시계

1930년대 초반 제작된 초창기 린드버그 아워 앵글 시계

린드버그 아워 앵글은 그 외형부터 일단 당대의 여느 시계들과 달랐다. 기계식 수동 무브먼트를 통해 현재 시각은 물론 다이얼 안에 180도 각도를 표시해 12시간계를 표시하고(360도는 24시간), 기발하게도 외부 회전 베젤의 간단한 조작을 통해 최초 측정한 그리니치 평균시에서 아워 앵글을 통해 측정한 현재 시각을 빼는 방식으로 균시차와 현재 위치의 경도까지 추산할 수 있었다. 당시 이러한 전문 항법용 육분의 측정방식을 손목시계 형태로 구현한 모델은 론진의 린드버그 아워 앵글이 유일했다.

이렇듯 린드버그 아워 앵글은 20세기 초 항공사의 개척자로 통했던 찰스 린드버그의 아이디어와 론진의 앞선 기술력이 만나 예상치 못한 시너지를 낸 시계로 등장과 동시에 큰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 해군과 공군 소속의 장교들 사이에서 선호되었으며, 당시의 시계들은 지금까지도 빈티지 컬렉터들 사이에서 매우 고가에 거래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현재 시간은 물론 균시차·경도까지 파악
린드버그와 론진의 인연은 1933년에도 새로운 시계 제작으로 이어졌다. 린드버그는 아내 앤 모로우 린드버그와 함께 아프리카 서쪽 군도에서 브라질을 거쳐 극북쪽을 가로지르는 새 북대서양 항로 개척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당시에도 린드버그의 손목에는 론진의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가 착용돼 있었다. 훗날 ‘린드버그 아틀란틱 보이지’라고도 불린 해당 시계는 5분의 1초까지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타코미터 눈금 표시를 통해 한 시간에 500㎞까지 스피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듯 론진과 린드버그의 긴밀한 파트너십은 론진이 모험가들이 선호하는 시계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실제로도 론진은 린드버그 외에 다양한 분야의 모험가들을 후원했고, 그들을 통해 어떠한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정확한 시간을 보장하는 시계라는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한다.

1987년 론진은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60주년을 기념해 초창기 린드버그 아워 앵글 오리지널 모델을 복각하면서 케이스 사이즈를 47.5㎜로 대폭 키운 1000개의 특별 한정판 모델을 발표한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크로노그래프 기능의 린드버그 아워 앵글 워치를 선보였으며, 2007년에는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80주년을 기념해 전체 18K 골드 케이스 버전의 한정판 모델을, 2010년에는 오리지널 디자인을 계승하되 ETA에서 제작한 오토매틱 무브먼트를 탑재한 스틸 케이스 모델을 현재까지도 계속 선보이고 있다.

린드버그 아워 앵글이 8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항공시계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시계 중 하나로 회자되며 전설적인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던 데는 시계를 디자인한 찰스 린드버그의 후광도 물론 있지만, 시계의 가치를 꾸준히 보존하고 발전시킨 론진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비록 70년대 쿼츠 쇼크 이후로 한동안 정체된 행보를 보여 왔던 론진이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과거의 아카이브를 재발굴하고 그 미적·기능적 장점들을 계승하는 헤리티지 컬렉션으로 다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애쓰고 있다. 특히 린드버그 아워 앵글은 론진의 헤리티지(유산)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성취이자 내비게이션 워치의 효시이며 항공시계의 영원한 아이콘이다.

<장세훈 시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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