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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저녁이 있어요 ‘칼퇴근’하는 직장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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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근로의 함정에 빠져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기업문화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오후 6시 정시퇴근, 아직은 일부 기업의 일이지만 회사는 업무 효율성이 높아져 좋고 직원들은 일과 삶이 있어 좋다.

SK에너지 물류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는 경력 2년차 조모씨는 요즘 하루가 길어지고 풍성해졌다. 7월 1일부터 ‘칼퇴근제’가 시행되면서 생겨난 변화다.

저녁 6시만 되면 ‘구성원 여러분, 근무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보고, 회의문화 혁신, 업무 프로세스 개선을 통해 초과근무 없는 즐겁고 신나는 일터를 다함께 만들어갑시다’라는 사내방송이 나온다.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는 임원이나 팀장은 직원들을 향해 “빨리 퇴근합시다”라는 말을 전하고 사무실을 먼저 나간다. 상관 눈치를 보지 말고 퇴근하라는 배려다. 저녁 6시30분이면 분주했던 사무실은 인적 없는 곳으로 서서히 바뀐다. 저녁 7시가 되면 사무실 조명과 에어컨까지 꺼진다. 무조건 사무실에서 나가라는 표시다.

저녁 6시 정시퇴근을 알리는 사내방송이 나오면 SK이노베이션 직원들은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간다. | SK이노베이션 제공

저녁 6시 정시퇴근을 알리는 사내방송이 나오면 SK이노베이션 직원들은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간다. | SK이노베이션 제공

여느 때 같으면 팀장이 “밥 먹고 합시다”라며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우르르 몰려갈 시간이다. 조씨는 이제 그 시간이면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 있다. 7월 1일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임원이나 팀장이 사무실에 있으면 퇴근은 꿈도 꾸지 못했다. 퇴근시간이 늦어지니 사무실 사람들과 회식도 잦아서 술 한 잔 하고 나면 집에 가서 잠자는 것이 일이었다. 평일에 데이트 약속을 잡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학원을 다니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6시 퇴근을 강제하기 시작하면서 퇴근 이후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조씨의 동료도 마찬가지다. 영어학원을 다니거나 골프나 수영을 배우는 직원도 많아졌다. 퇴근시간이 빨라지니 기혼자들은 집에 돌아가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게 됐다.

컴퓨터·에어컨 ‘off’ 강제로 퇴근시켜
“매일 야근에 회식 때문에 밤 늦게 돌아오던 남편이 집에 일찍 오자 아내가 ‘당신 회사에서 잘렸어?’라고 물어봤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고 전했다.

SK이노베이션과 그 계열사인 SK에너지·SK종합화학은 조직문화 개선을 위해 ‘초과근무 제로화 프로젝트’를 7월 1일부터 시행 중이다. 말뿐인 정시퇴근을 방지하기 위해 직원의 초과근무 현황과 개선 여부를 팀장과 임원의 인사평가에 반영하기로 했다.

회사가 나서서 정시퇴근을 강제하고 이를 지속하기 위한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직원들의 일상도 달라졌다.

SK이노베이션 홍보팀에서 광고를 담당하고 있는 이모 과장은 저녁 6시 정시퇴근이 반갑기만 하다. 매일 사내 건물 2층에 마련된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찾아서 집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야근을 할 때마다 친정어머니에게 “아이 좀 대신 찾아줘요”라는 부탁을 해야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아이와 함께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장도 볼 수 있게 됐다. 가정과 회사 일을 모두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정시퇴근이 이 과장에게 가져다준 변화다. 이 과장은 “저녁 6시에 퇴근을 하니까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생겼다.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을 해서 배우고 싶은 것도 생겼고, 보고 싶은 공연도 평일에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아이와 함께 맘 편히 퇴근을 할 수 있는 게 좋아요. 남편도 내가 정시퇴근을 한다니까 너무 좋아하더라구요.”

야근을 밥먹듯 하고 퇴근 후 자신의 삶이 없었던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정시퇴근을 보장하려는 기업들의 움직임이 조용히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기업들엔 정시퇴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일이 있든 없든 퇴근시간을 넘겨도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게 관행처럼 여겨졌다. 밤 늦게까지 남아서 일을 해야 윗사람에게 사랑받고, 능력 있는 직원으로 통했다. 조금 일찍 퇴근하면 상사는 물론이고 주위 동료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사실 사무실에서 오래 일하는 게 능률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무직의 경우 야근에 익숙하면 야근시간에 맞춰 일을 하는 경향이 늘어난다. 일찍 끝낼 수 있는 일도 미리 처리하지 않게 된다는 얘기다.

조씨는 “야근이 많아지면 일과 시간에 집중하기 어렵다. 컴퓨터로 딴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면서 “정시퇴근을 하게 되면서 시간에 맞춰 일을 끝내려고 노력하게 됐고, 업무 효율성도 그만큼 높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칼퇴근’에 긍정적이다.

일찍부터 정시퇴근을 강제한 대상그룹은 퇴근 후 동호회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사진은 대상그룹 직원들이 퇴근 후 탁구를 즐기고 있는 모습. | 대상그룹 제공

일찍부터 정시퇴근을 강제한 대상그룹은 퇴근 후 동호회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사진은 대상그룹 직원들이 퇴근 후 탁구를 즐기고 있는 모습. | 대상그룹 제공

노용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글로벌경영학과)는 ‘한국, 장시간 근로의 함정에서 벗어나야’라는 칼럼을 통해 “장시간 근로가 필요하다는 근거로 기업 경쟁력이 많이 거론되고 있지만 여러 방식으로 통계 분석을 시도해본 결과, 장시간 근로가 기업의 재무성과에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면서 “장시간 근로 관행 개선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고품질·고생산성 사회로 가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노동시장 구조개편의 핵심적 요소”라고 지적했다.

정시퇴근은 몇몇 기업들에선 새로운 게 아니다.

IBK기업은행은 2009년 10월부터 PC-off 시스템을 시행하고 있다. 저녁 7시35분에 본점 및 영업점 PC가 자동으로 꺼지는 것이다. 회사에 남아 있지 말고 퇴근을 하라는 것이다. 이 제도 시행 전 은행 직원들의 퇴근시간은 보통 밤 10~11시였다.

원래 은행권은 퇴근시간이 늦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

‘장시간 노동 = 기업 경쟁력’은 착시
2011년 4월부터는 PC-off 시간을 경영평가 배점에 넣으면서 컴퓨터가 꺼지는 시간이 평균 저녁 8시에서 저녁 7시로 당겨졌다.

조준희 은행장은 2010년 12월 취임사를 통해 “단순히 시간만 많이 투자하면 더 높은 성과가 나올 것이라는 낡은 생각을 버리자”며 근무시간 정상화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경력 5년차 김모 대리는 “예전에는 퇴근이라는 게 솔직히 없었다. 밤 10시, 11시, 그렇게 퇴근하다 보니 일도 느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솔직히 일하는 마인드가 달라졌다”고 김 대리는 말했다. “이젠 저녁 7시 전에 퇴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퇴근을 하기 위해서라도 집중을 할 수밖에 없어요.”

대상그룹은 2009년부터 즐거운 일터 만들기의 일환으로 ‘Great Work Place’(GWP·일하기 좋은 직장)를 시행하고 있다. GWP의 핵심이 저녁 7시 이전 강제퇴근 정책이다.

‘일이 많은데 어떻게 퇴근하느냐’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왔지만 ‘정시퇴근율’을 수치로 관리해 연말 인사고과에 반영시키면서 제도가 정착됐다.
SK이노베이션이나 대상처럼 정시퇴근을 강제하지 않는 기업들도 일주일에 하루를 ‘패밀리 데이’로 정해 정시퇴근을 강제하기도 한다. 현대해상, 유한킴벌리 등이 이런 제도를 시행 중이다.

정시퇴근 제도에 대해 직원들의 반응은 대부분 긍정적이다.

조씨는 “지금까지 회사생활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회식이 많아서 술 한 잔 마시고 집에 가는 게 일이었는데, 정시퇴근 이후 회식이 많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퇴근 이후에 여유가 있으니까 여러 가지를 계획한다”는 그는 “친구들도 맘 편하게 만나고 어학학원 수강이나 자격증 준비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물론 한편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시퇴근 시행 초기 SK이노베이션 내부에서는 “일은 그대로인데, 퇴근만 일찍 시킨다고 일이 줄어드나. 못한 일은 집에서 해야 하나”라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SK에너지의 한 부장급 직원은 “어쩔 수 없이 야근을 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야근 사유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퇴근 이후에도 집에 가지 않고 회사 부근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사무실에 다시 들어가는 임원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줌인]내게도 저녁이 있어요 ‘칼퇴근’하는 직장인들

익숙해져 있던 야근 관행을 떨치지 못한 데서 생겨난 불안감의 표출이었다.
정시퇴근이 정착한 기업에서는 “이런 일은 금방 사라진다”고 말한다. 대상그룹 관계자는 “처음에는 우리 내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금방 해결된다. 퇴근시간에 맞춰서 일을 끝내야 하기 때문에 일의 효율성이 눈에 띄게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무실에 늦게까지 있는다고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담배 피우고, 일과는 상관 없는 것으로 시간을 때우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정시퇴근제 도입 이후 그런 모습이 사라졌고, 업무 효율성도 높아졌다.”

실제로 대상은 정시퇴근 실시 전 매출액이 9200억원이었지만, 정시퇴근 실시 이후 2009년 1조90억원, 2010년 1조2000억원, 2011년 1조3900억원, 2012년 1조5500억원으로 급상승했다.

초기엔 불안해 회사주변 맴돌기도
일하는 시간이 줄어든 것을 감안하면 그만큼 업무 효율성이 높아졌다는 방증이다.

효과는 그것만이 아니다. 이직률도 낮아졌다. 회사에 대한 만족도가 커진 것이다. 대상 관계자는 “직원들이 정시퇴근을 사원 복지혜택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상그룹은 정시퇴근에만 그치지 않고, 원하는 시기에 눈치보지 않고 쉴 수 있는 ‘리프레쉬 데이’를 비롯해 해외 다문화체험 프로젝트도 도입했다.

전문가들은 정시퇴근 문화가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당장 제조업계에서는 노동시간 줄이기가 화두가 되고 있다. 현대·기아차의 주간 연속 2교대제가 대표적이다. 일자리 나누기 차원에서 노동시간 줄이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안재원 연구원은 “제조업계에서는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있어 왔지만, 사무직은 상대적으로 그런 움직임이 적었다”면서 “제조업처럼 사무직도 노동시간 줄이기를 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한국인재전략연구원 신원동 원장은 “요즘 기업의 화두는 GWP다”라면서 “요즘 인재는 연봉이 높은 기업보다는 일에서 만족을 찾고 재미를 얻을 수 있는 기업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신 원장은 “기업이 직원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민한 결과물이 정시퇴근”이라면서 “직원도 좋아하고 기업도 좋은 것이 정시퇴근이다. 정시퇴근 문화는 장기적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정시퇴근은 직원들도 반기고, 기업에도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준다. 양측 모두가 ‘윈·윈’하는 제도라는 평가가 높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다.

한국 사무직 노동자의 근무환경은 좋지 않기로 악명이 높다. 한국은 경제협력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노동시간이 긴 나라에 속한다. 7월 16일 CNN머니는 OECD 통계를 인용해 노동강도가 센 OECD 10개국을 선정했다. 한국은 멕시코, 칠레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멕시코의 경우 연평균 노동시간이 2317시간, 칠레가 2102시간, 한국이 2092시간이었다. 미국은 1798시간, 일본은 1765시간을 기록했다. 한국은 OECD 회원국 평균보다 노동시간이 여전히 300시간 이상 길다.

직장인들은 하루 업무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국제 회계 컨설팅업체인 언스트앤영은 지난 4월 7일 한국 사무직 직장인 3000명을 대상으로 생산성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해 발표했다. 

설문조사 결과 한국 직장인은 일주일에 평균 5.21일, 43.4시간을 근무했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8시간30분(점심시간 1시간 제외)인데, 이 중 1시간54분을 개인활동에 사용한다. 

개인활동으로 소비하는 시간을 살펴보면 인터넷 검색·신문 잡지 읽기(25.8%, 28분), 동료와 잡담 및 휴식(22.4%, 25분), 사적인 전화통화(10.3%, 11분) 등이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개인활동 시간을 제외한 업무시간 중 2시간30분(38%)도 비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대답한 것이다. 직장인들은 결재를 기다리는 시간, 보고서 작성 등이 비효율적인 업무라고 판단했다. 세부 사항을 살펴보면 ‘의사결정·검토과정에서 지연·대기’(20.1%), ‘불분명한 지시·실수·중복작업 등’(18.4%), ‘불필요한 회의 및 고객 응대’(18%) 등이다.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비효율적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업무시간 중 개인활동으로 소비되는 1시간54분과 비효율적 업무에 투여하는 2시간30분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연간 146조원이다.    

언스트앤영은 “사무직 직장인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직장인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충분한 휴가와 휴식 보장’(30.6%), ‘정규 퇴근시간 보장’(26.6%) 등을 전제조건으로 꼽았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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