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 저해’ 이유로 수정 내역표 공개 거부… 협정 발효되자 입장 급선회
1300쪽에 달하는 책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책에서 모두 296건의 오탈자가 발견됐다. 출판사는 처음에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며 오탈자 문제를 덮으려고 했다. 하지만 오탈자가 있다는 독자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자 출판사는 재검독을 실시했고 296건의 오탈자를 잡아냈다.
출판사는 2쇄 때부턴 오탈자를 바로잡은 책을 시중에 유통시켰다. 그런데 1쇄를 구입한 독자들이 출판사에 오탈자 정오표를 달라는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2쇄를 인터넷으로 내려받을 순 있지만 1쇄에서 어느 부분이 바뀌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선 정오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판사는 “2쇄를 출판사 홈페이지에 공개하였으니 이를 참조하길 바란다”며 정오표 공개를 거부했다. 2쇄가 이미 공개됐기 때문에 1쇄를 구입한 독자들이 오탈자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1년 4월에도 외교부는 한·EU 자유무역협정(FTA)한글본 번역오류 문제로 논란을 빚은 바 있다. 당시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외교통상부 합동브리핑룸에서 대국민 사과를 했다. | 연합뉴스
민변, 1년 전에 정오표 공개 청구
당신이 1쇄를 구입했던 독자라면 출판사의 태도를 납득할 수 있을까. 당연히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정오표가 없는 이상 방대한 분량의 책에서 오탈자를 일일이 찾아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적지 않은 시간을 쏟아부으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잘못은 오탈자를 발견하지 못한 출판사에 있는 만큼 독자가 이런 수고를 감당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화가 난 독자들은 급기야 출판사를 상대로 정오표를 공개하라며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독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출판사는 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했다가 5개월이 지난 다음 슬그머니 항소를 취하하고 정오표를 공개했다. 독자 입장에선 허탈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소 거친 비유일 수 있지만 이 출판사는 지난해 6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 한글본에서 번역오류를 뒤늦게 발견한 외교통상부다. 외교부는 지난해 3월 한·미 FTA 한글본에 번역오류가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자 재검독을 실시했고, 석달 뒤에 296건의 번역오류가 있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외교부는 당시 잘못된 번역 166건, 잘못된 맞춤법 9건, 번역 누락 65건, 번역 첨가 18건, 일관성 결여 25건, 고유명사 표기 오류 13건 등이 있었다며 번역오류의 유형과 일부 사례를 소개했다. 하지만 296건 전체의 정오표는 공개하지 않고 버텼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은 정보공개법에 따라 지난해 6월 외교부를 상대로 정오표 공개를 청구했다. 하지만 외교부는 기존의 협정문과 수정된 협정문이 모두 일반에 공개되었다는 이유로 민변의 정보공개 청구를 거부했다. 민변은 외교부가 ‘외교관계 등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라며 정오표를 공개하지 않자 행정소송으로 돌입했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2월 “한·미 FTA 협정문 한글본은 본문, 상품 양허표, 품목별 원산지 규정, 유보목록 등 약 13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구성돼 있다는 특성에 비추어볼 때 종전 협정문과 수정 협정문을 일일이 대조해 번역오류 내역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 매우 곤란하다고 보여진다”며 정오표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국민들이 일일이 기존 협정문과 새로운 협정문을 비교해 수정된 내역을 확인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2011년 9월 당시 민주당 박주선 의원이 한·미 FTA 비준안 논의를 위한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번역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 김문석 기자
재판부는 또 “협정문의 번역오류로 인한 개정내용이 객관적으로 투명하게 공표됨으로써 한·미 FTA 협상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위한 여론 형성의 여건이 마련될 수 있다”고 밝혔다. 정오표 공개가 국익을 현저히 해하기는커녕 올바른 여론 형성을 위해 되레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마지막으로 외교부가 한·유럽연합(EU) FTA 번역오류 정오표는 이미 공개한 사례도 들었다.
외교부는 지난 1월 재판부의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했다. 외교부는 1심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정된 협정문이 지난해 6월 공개된 이후 7개월 가까운 시간이 흘러 국민의 알 권리가 이미 충족됐고, 한·미 FTA 협상 관련 문서는 양국간 합의에 따라 발효 뒤 3년까지는 비공개 문서로 분류된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정치적 판단으로 국민 알 권리 침해
하지만 외교부는 지난 5월 25일 급작스럽게 한·미 FTA 한글본 정오표를 공개한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하루 전인 24일에는 항소도 취하했다. 보도자료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 담겨 있었다. 외교부는 이번 정오표 공개가 “미국과의 협의가 완료된 데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외교부가 미국과 접촉을 했다는 것은 그동안의 입장과 달리 정오표 공개를 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외교부는 왜 입장을 바꿔 정오표를 공개했을까. 외교부는 보도자료에서 “한·미 FTA가 이미 지난 3월 15일 공식 발효됐다”는 점을 공개의 이유로 들었다. 건조하게 보이는 이 문장엔 외교부의 속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외교부는 1심 재판에서 “(한글본 번역오류 정오표가 공개될 경우) 한국과 미국 내에 한·미 FTA를 저지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진 반대론자들에게 불필요한 핑곗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양국 내 비준을 지연시킬 가능성이 많다”며 정오표 공개가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것을 경계했다. 하지만 보도자료가 밝히고 있듯이 한·미 FTA는 양국 의회의 비준을 거쳐 이미 발효됐다. 또 4월 총선 역시 마무리된 상황이라 정오표 공개의 파급력이 크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소송을 맡았던 민변의 정석윤 변호사는 “외교부는 한·미 FTA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민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자의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외교부가 정오표를 공개하기로 하면서 지난해부터 불거진 번역오류 논란은 형식적으로 볼 땐 일단락됐다. 하지만 외교부의 자의적이고 정치적인 판단 때문에 1년 가까이 침해된 국민의 알 권리는 일단락될 수 없는 문제다. 민변 외교통상위원장인 송기호 변호사는 “이번 정오표 공개 결정이 그동안 국민의 알 권리를 부인하고 정보를 독점한 외교부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지환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bald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