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사망으로 한국경제 당분간 북한뉴스 따라 일희일비
‘금세 안정을 되찾고 있지만 북한의 후계구도로 인한 불안정성은 여전하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을 둘러싼 시장의 반응은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매체들은 지난 12월 19일 정오 ‘전체 당원과 인민군 장병과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발표문을 통해 김위원장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의 사망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곳 중 하나는 여의도 증권가였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하던 증권맨들은 회사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1790선에서 오가던 코스피지수는 김 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5분 만에 40포인트가 급락했다. 이날 코스피지수는 지난 주말보다 63.03포인트(3.43%) 하락한 1776.93에 거래를 마쳤다. 코스닥지수도 26.97포인트(5.35%) 급락해 477.61에 장을 마쳤다.
생필품주와 방위산업 관련주가 급등했다. 사재기가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에 라면과 생수 등을 생산하는 삼양식품이 가격제한폭인 14.89% 상승했고, 농심도 2.69% 올랐다. 안보 불안감이 커지자 방위산업주도 급등했다.
환율도 롤러코스터 장세를 연출했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달러당 16.20원 오른 1174.80원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 10월 10일 이후 처음으로 1170원대까지 오른 것이다.
금융시장 하루만에 진정세로 돌아서
경제당국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이날부터 24시간 비상근무체계를 가동했고,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비상금융상황 대응팀’을 꾸려 시장 상황에 대응하기로 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김정일 위원장 사망 소식은 경제를 포함한 우리 사회의 위험요인으로 단기적으로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는 만큼 면밀히 관찰하겠다”며 “국민들은 일상적인 생필품 사재기 등 과도한 반응을 자제해달라”고 당부했다. 시장에서는 유럽 재정위기와 세계 경제의 성장세 둔화로 고전이 예상되는 2012년 한국 경제가 ‘북한 변수’라는 새로운 악재를 맞이했다는 분석이 이어졌다.
하지만 금융시장은 하루 만에 진정세로 돌아섰다. 김 위원장의 사망 하루 뒤인 12월 20일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16.13포인트(0.91%) 오른 1793.06에 장을 마쳤다. 과거 북한 리스크가 노출됐을 때 대부분 단기적인 주가 하락을 거친 뒤 상승했던 경험에 비춰보면 저가 매수세가 유입됐을 것으로 분석됐다. 원·달러 환율도 전날보다 12.60원 급락한 1162.20원에 마감하며 전날 상승폭을 빠르게 만회했다.
LG경제연구원은 “김정일 사망 발표 이후 주가 하락이 큰 것처럼 보이지만, 유로존 위기에 따른 불안감이 겹친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과거의 경험을 보면 북한 리스크가 발생하더라도 금융시장은 곧 안정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번 역시 학습효과로 주가와 환율이 하루 만에 반등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사망이 한국 국가신용 위험도에 미친 영향도 다른 이슈들에 비해 크지 않았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전 세계의 시선이 한반도에 몰렸지만 정작 사망 당일 한국의 신용 위험도는 그다지 나빠지지 않았다. 위험도 변화 수치로만 보면 올해 들어 발생한 충격 중 16번째였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파괴력이 미국과 유럽에서 불거진 악재보다 훨씬 적었다는 뜻이다. 예외적으로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이 발생한 뒤 무디스가 2003년 2월 한국의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바꾼 적이 있었을 뿐이다.
해외 투자은행(IB)들도 김 위원장의 사망으로 불확실성은 확대됐지만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유로존의 재정위기가 악화된 상황에서 김 위원장의 사망이 한국 경제에 단기적으로 금융시장 변동성을 확대시킬 수 있지만, 실질적인 위기상황이 발발하지 않는 한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김 위원장 사망 이후 단기 충격에서 벗어나 곧바로 안정을 되찾고 있지만 문제는 북한의 후계구도 등으로 인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불확실성이다. 향후 수년간 북한 체제의 전개와 관련해 상당한 불확실성이 지배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다.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김 위원장 사망이 한국 신용등급에 미치는 즉각적인 영향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다만, 향후 권력 승계의 진행과정이 한국 신용등급 평가에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북한리스크 고조되면 충격 증폭
삼성경제연구소 정영식 수석연구원은 “북한의 소요사태나 정국불안이 예상보다 크지 않다는 분석도 있지만 김정은이 나이도 어리고 권력 승계 준비기간도 짧다는 평가가 혼재돼 있어 당분간 북한 관련 뉴스에 따라 일희일비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번 쇼크가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은 김 위원장의 영결식이 끝나는 29일 이후에나 가늠해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북한 김정은 체제 등장과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 보고서에서 김정은 체제가 중장기적으로 안착될지 여부에 따라 북한 체제가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을 4가지 시나리오로 나눠 분석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김정은 체제가 안정되면서 북한이 완만하고 실험적인 개혁·개방을 추구하는 경우다. 다음은 기존 체제 유지를 위해 앞으로도 김정일식 생존전략을 유지하는 시나리오다. 이 두 경우는 한국 경제에 되레 긍정적인 영향이 발생하거나 지금과 같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세습체제가 동요하거나 북한이 붕괴 혹은 파국을 맞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피하기 어렵다. 권력체제가 동요하면서 중국이나 미국 등 주변국 개입이 발생해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세 번째의 경우 외국인 투자자금의 이탈이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급격하게 북한 체제가 붕괴되는 네 번째 시나리오의 경우 북한 경제를 유지해야 하는 부담으로 한국의 재정적자와 국가부채가 폭증할 수밖에 없다.
LG경제연구원은 “현재 세계 경제가 취약한 상황에서 북한 리스크까지 고조될 경우 우리 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증폭될 우려가 있다”며 “외환·재정면에서 대외충격 흡수능력을 키워나가고 각 경제주체들은 비상대응 플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유럽 재정위기 등의 대외 불안요인은 우리가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가 아니지만 북한 관련 문제는 다르다”며 “이해당사국 사이에서 한반도의 긴장 고조를 막기 위해 우리의 주도적인 역할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지환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bald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