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거시경제정책 편향 ‘수출대기업 축가 들으며 민생 신음’
“우리반 한두 명 서울대 보내려고 내가 갖고 있는 참고서 보태주고 내 도시락 먹여주고, 과자 나눠주고, 또 차표까지 끊어줬는데 정작 내가 (시험에) 떨어져 피해를 보는 꼴 아니냐.”
경제평론가인 박경철씨는 최근 자신이 진행하는 KBS라디오 <경제포커스>에서 고환율에 시달리는 국민들의 심정을 이같이 표현했다. ‘서울대 간 한두 명’은 삼성, 현대차와 같은 글로벌 수출대기업을 말하고, 시험에 떨어진 ‘나’는 비싼 물건을 사야 하는 일반 서민들을 말한다.
경제에 ‘공짜 점심’은 없다. 정부가 수출기업들을 밀어주느라 고환율을 유지하면서 물가가 큰 폭으로 뛰고 있다. 북아프리카발 민주화시위, 이상기온으로 유가와 농축산물 가격이 불붙은 상황에서 고환율과 저금리 정책은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는 것을 간파한 정부는 뒤늦게 물가와의 전쟁을 선언했지만 반응은 별로다. 그 방법이라는게 70년대식 물가 단속과 닮아있다보니 정부 부처 내에서조차 자조섞인 한탄이 나온다. 고환율과 저금리 등 물가폭등을 부르는 거시적인 배경을 치유하지 않고는 물가가 쉽게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고물가·실질소득 마이너스 ‘이중고’
2월 24일 물가고를 반영한 두 가지 통계가 발표됐다. 하나는 한국은행이 발표한 ‘2월 소비자 동향지수’다. 소비자들의 체감경기를 나타내는 소비자심리지수(CSI)는 105를 기록, 2009년 5월 이후 1년 9개월 만에 최저수준으로 떨어졌다. 6개월 전과 비교한 현재 생활형편심리를 묻는 생활형편CSI와 6개월 뒤 생활형편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 생활형편전망CSI도 일제히 하락했다.
소비자들이 현 상황을 어렵게 보는 주된 이유는 ‘물가’였다. 향후 1년간 기록할 것으로 전망하는 기대인플레이션율은 전달과 같은 3.7%에 달했다. 기대인플레이션율은 지난해 6월만 해도 3.0%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 하반기부터 급속히 증가했다. 다음달은 기대인플레이션율이 더 올라갈 가능성이 커 보인다. 구간별로 향후 1년간 4.0~5.5% 범위 내에서 오를 것으로 기대하는 소비자 비중이 무려 4.1%포인트나 증가했기 때문이다.
같은 날 발표된 ‘2010년 4·4분기 가계동향’에서는 실질가계소득이 마이너스 1.2%를 기록했다. 실질소득이 마이너스로 전환된 것은 1년 3개월 만이다. 실질소득이 마이너스라는 얘기는 물가상승이 임금상승을 앞섰다는 얘기다. 서민들로서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셈이다.
총선과 대선이 1년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정부가 가만 있을 리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연초부터 ‘물가와의 전쟁’을 선포하더니 1월 13일에는 범정부 차원의 고물가 대책을 내놓았다. 한국은행은 금리를 ‘전격’ 올렸다. 지난해 경기가 좋을 때 금리를 올려 물가상승에 대비하라던 시장의 목소리를 외면하던 한은이었다.
하지만 환율대책은 빠졌다. 환율정책은 금리와 함께 물가를 잡기 위한 대표적인 거시정책이다. 왜 빠졌을까.
연세대 성태윤 교수는 “정부가 5% 경제성장을 목표로 세우다 보니 경제성장을 위해서 환율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며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수출기업의 비중이 크다보니 수출기업에 영향을 줄 환율을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양대 하준경 교수도 이같은 주장에 동의한다. 하 교수는 “5% 성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출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성장목표를 5%로 세운 정부의 물가목표는 2∼4%다. 고성장을 하면서도 저물가를 유지하겠다는 말이다. 이른바 경제학에서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성장모델인 골디락스 경제를 올해 이루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목표는 금융위기의 여진이 여전한 상황에서는 정권 초기 내세웠던 7·4·7정책(연간 7% 경제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7대 경제강국)만큼이나 이루기 힘들다는 게 중론이다.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이 동시에 이뤄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경기가 호황일 때 가능하다.
내수기업·1차산업 경쟁력 상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때부터 고환율에 강한 집착을 보여왔다. 7%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고환율 정책을 통한 수출기업 지원이 불가피했다. 10년 외환위기를 불러온 당사자였던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환율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환율은 나라 경제를 지키는 주권이며 환율 관리는 경제적 대외균형(경상수지 흑자)을 지키기 위한 주권행사’라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한 마디로 외환위기는 환율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탓이라는 의미다.
수출기업에 환율효과는 대단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은 2009, 2010년 최악의 경제위기 속에서도 사상 최고의 이익을 기록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일에 947원이던 환율이 2008년 1100원대를 돌파하더니 2009년 1276원, 2010년 1156.26원으로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달러당 200∼300원을 보장해준 셈으로 대기업들은 앉아서 30% 내외의 ‘불로소득’을 올렸다.
정부가 의도한대로 경상수지 흑자폭도 대폭 늘어났다. 2009년에는 317억9000만 달러 흑자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2010년은 역대 네번째로 경상수지 흑자가 많았다.
수출도 잘되고, 경상수지가 늘어나 튼튼한 나라가 됐으면 국민들이 훨씬 잘살아야 하는 게 정상이다. 과연 그렇게 됐을까?
대기업으로 돈이 흘러간 만큼 국민들의 주머니는 헐거워졌다. 국민들이 지불하지 않아야 할 돈을 얼마나 지불했는지는 내수용 수입액에서 추정해볼 수 있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2010년 우리나라 내수용 수입액은 2551억 달러다. 지난해 환율은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 환율보다 209원 높았다. 두 수치를 곱하면 53조원이 나온다. 이만큼의 돈을 국민들이 더 지불했다는 의미다. 같은 방법으로 계산하면 2009년은 63조원, 2008년은 3월 이후 30조원을 추가 지불해야 했다. 그러니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3년간 146조원에 육박하는 돈이 휘발유에서, 식료품에서, 아이들 장난감에서, 중국산 가전용품에서 ‘십시일반’으로 빠져나갔다. 146조원어치만큼 물가지수도 뛰었다. 내수용 수입품목은 주로 농축수산물 등 1차산업과 경공업제품이다.
총선·대선 앞두고 어설픈 물가대책
원·달러 환율, 임금, 원유가격, 공공요금 중 가장 물가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 요소는 무엇일까. 한국은행이 물가 파급효과를 계측해본 결과 원·달러 환율이 10% 뛰면 생산자물가는 3.04%나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임금(2.94%), 공공요금(1.85%)보다 높은 것으로 환율 상승이 수입물가에 직접 반영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다만 수입물가가 국내에서 유통·가공을 거쳐 소비자물가로 반영될 때는 그 폭이 낮아졌다. 원·달러 환율이 10% 상승할 때 소비자물가는 1.84%가 올랐다. 이는 임금(3.20% 상승), 공공요금(2.24%)보다 낮지만 유가(0.42%)보다는 여전히 높은 것이다.
이 계산대로라면 2월 24일 현재 1131원인 환율이 1000원대로 떨어지면 4.1%인 1월 소비자물가는 2%대로 낮아질 수 있었다는 의미다. 만약 원·달러 환율을 19% 떨어뜨려 이명박 정부 출범일 당시 환율(947원)로 되돌려놓으면 소비자물가가 1%대까지 내려갈 수 있다.
환율에 따른 소비자물가 상승이 더 나쁜 것은 저소득층과 서민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는 점이다. 저소득층일수록 생필품과 식품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지난해 4·4분기에 소득하위 20%인 1분위의 적자가구 비율이 53.7%로 1년 전(52.9%)보다 늘었다. 반면 소득상위 20%는 적자가구 비율이 9.1%로 2009년 10.4%보다 감소했다.
고환율은 임금인상의 발목도 잡는다. 1월 수입물가는 전년 같은 달에 비해 14.1%가 뛰어올랐지만 수출물가는 4.9% 올리는 데 그쳤다. 수입을 해 가공한 뒤 수출을 하는 업체라면 들여올 때 오른 물가를 내보낼 때는 다 반영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기업의 비용을 줄였거나 임금인상을 억제해 판매가격을 유지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앉아서 수익성을 까먹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물가가 오른 만큼 우리 경제의 체질이 강해졌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지금과 같은 일방적인 수출기업 감싸기는 오히려 내수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김정호 자유기업원장은 “지금의 환율정책은 60~70년대 중상주의적 외환보유액 쌓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수출만 일자리를 만들고 수입은 일자리를 만들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칠레산 저가 홍어가 수입되면 홍어를 파는 식당들이 잘 될 것 아니냐”며 “식음료 등 내수기업과 항공·운수 등 외채가 많은 기업, 농업 등 1차산업은 오히려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환율=경제성장’이라는 공식에 대한 정부의 맹신은 여전히 두껍다. 고환율을 지지하는 구세대 인사들이 여전히 정부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변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환율과 기업 경쟁력’ 보고서를 통해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는 환율 급등으로 인한 영향력이 매우 컸다”며 “하지만 원·달러 환율의 단위 변동당 영향력은 지난 10년 동안 거의 10분의 1 수준으로 낮아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우리 기업들이 해외 판매시장과 투자지역을 다변화한 데다, 외화차입과 선물환 거래를 확대하면서 환율 영향을 줄였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가 우리나라의 환율정책을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우려되는 점이다. 미 재무부는 2월 4일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국이 글로벌 경제 위기가 심각할 때는 원화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강하게 개입했다”며 “2009년 초 이후에는 반대로 원화 절상을 늦추기 위해 개입했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한국을 적시해 환율문제를 거론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고환율 정책을 유지한 덕에 수출이 잘됐다”는 식의 정부 고위관료들의 서툰 자화자찬이 빌미를 제공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 환율이 높다는 데 대해서는 민간연구소들도 부정하지 않고 있다. 물가도 안정시키면서 성장도 저해하지 않는 이상적인 환율에 대해 민간연구소들은 1000원대 중반을 제시했다. LG경제연구원 이창선 금융연구실장은 “지난해 가을 적정환율을 추정해봤더니 1000원대 중·후반이 나왔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영식 수석연구원도 “경상수지를 균형으로 만들고 성장률을 잠재성장률 수준으로 관리하는 균형환율을 연구해보니 1000원대 중반”이라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009년 추정한 균형환율은 1017∼1079원이다. 현행보다 100원 정도는 더 떨어질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적정 균형환율은 1000원대 중후반”
환율이나 금리 등 거시정책적 방안을 동원하지 않는 물가단속은 결국 부작용을 낳는다는 게 중론이다. 올 하반기로 물가 인상이 전이되거나 기업들이 공급을 축소해 물가를 더 자극할 수 있다. 이른바 몸무게가 다시 돌아온다는 ‘요요현상’이 물가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는 말이다.
원·달러 환율이 1000원대로 떨어지면 입는 기업들의 피해는 얼마일까. 삼성경제연구소는 91개 수출기업의 영업수지가 17조원가량 악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LG경제연구원은 기업들의 시가총액이 1%인 6조원 정도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이런 수준의 수익 감소는 수입물가를 끌어내려 국민들이 얻는 편익과 비교한다면 충분히 감내할 만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LG경제연구원 측은 “2010년 원화가치는 장기 적정수준에 비해 평균 4~8% 저평가 상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며 “올해 원화가치가 작년에 비해 평균 5% 절상된다고 하더라도 장기 적정 원화가치에 거의 근접하거나 소폭의 저평가 상태에 해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