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말에 11개 지점 설립… 3일간 1차심사 통과자 25% 불과
2009년 12월 16일 경기 수원에 위치한 삼성미소금융재단 사업장을 방문한 김성준씨(48)는 2시간을 기다려 10분 상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혹시나’하는 마음이 ‘역시나’로 끝났다며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김씨의 대출 부적격 사유는 ‘채무’다. 미소금융이 무담보 대출이기는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 빚을 지고 있으면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보유재산 대비 채무액이 50%를 넘으면 미소금융 대출을 받을 수 없도록 규정돼 있다. 수원에서 자영업을 하는 김씨는 “한마디로 앞뒤가 안맞는 정책이다. 신용등급 7등급 이하부터 대출이 가능한데 그 등급에 세금 꼬박꼬박 잘 내고 은행권 대출 없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냐”면서 “결국 진짜 서민이 아니라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한 사람에게 대출이 이뤄진다고 보면 기존 제도권 금융과 다를 게 뭐냐”고 반문했다.
대출 자격 까다롭고 홍보 부족 심각
역시 대출 부적격자로 판정된 서울 도봉구에서 자영업을 하는 박주영씨(52)의 부적격 사유는 시가 2억원이 안되는 20평짜리 아파트 때문이다. 대도시(특별·광역시, 수도권 과밀억제권역) 기준으로 1억3500만원 이상의 재산이 있으면 미소금융 대출이 불가능하다는 조항에 걸린 것.
박씨는 “은행에서는 신용등급이 낮아 대출을 못받고 미소금융에서는 재산이 많아서 자격이 안된다고 하니 나 같은 사람은 도대체 어디로 가란 말이냐”면서 “제도적 보완을 하지 않는다면 미소금융도 결국 굳이 대출을 받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위한 대출 상품이 될 것”이라고 울분을 터트렸다.
이명박 정부가 대표적인 친서민정책이라고 주장하는 미소금융 사업이 지난해 12월 15일 수원에서 삼성그룹의 사업장을 시작으로 연내에 11개 사업장을 출범시켰지만 그 실효성에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미소금융의 취지가 제도권 금융기관에서 문전박대를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아주 저렴한 금리(4.5% 안팎)로 사업자금을 대출해 준다는 것이지만 창구를 찾은 75%에 해당하는 민원인들이 벌써부터 부적격 판정을 받아 사업 자체가 향후 제대로 안착할 수 있을지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제도권 금융기관에서 외면한 서민들을 위해 대출해 주겠다며 호기롭게 출발한 미소금융 사업이 초반부터 삐걱되고 있는 것이다.
대출 자격에 대한 기준이 기존 제도권금융과 다를 것 없지 않느냐는 비판과 함께 대국민 홍보 부족도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미소금융중앙재단 홍성준 대리는 “지난해 12월 15일 첫 번째로 개소한 삼성미소금융을 비롯해 5개 지점의 사흘 동안 대출 상담 건수는 1600여 건이고, 신용등급·재산보유현황의 1차 대출 심사를 통과한 사람은 400여 명인 약 25%로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원금·이자 회수 철저한 관리감독 절실
12월 17일 대전에서 사업장을 개설한 KB미소금융재단의 관계자는 “30초마다 문의전화가 걸려와 하루종일 전화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면서 “지금까지 약 150명이 상담했으며, 대출 가능자는 30% 정도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상담자 대부분이 미소금융의 취지를 잘못 이해하고 무작정 찾아오는 경향이 있다”면서 “자신의 고금리 채무를 저금리로 바꿀 수 있느냐는 문의가 많은 편이다. 미소금융을 정부가 무상으로 대여해 주는 서민정책지원금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고 전했다.
시행 과정 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미소금융 사업 자체의 구조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견해도 만만찮게 나오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연합 경제정의연구소장인 경원대 홍종학 교수는 “소액서민대출 사업인 미소금융 사업은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가 계속 반대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쇠고기 파동과 촛불시위로 인해 정권의 위기감이 깊어지고 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추락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중도 실용과 서민 껴안기를 내세우면서 급작스럽게 나온 작품”이라면서 “미소금융은 방글라데시 유누스 박사의 아이디어에서 차용했지만 우리나라 현실과는 근본적으로 달라 구조적 문제점을 해소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소금융 사업의 모태는 방글라데시의 유누스 박사가 시작한 그라민은행이다. 방글라데시 전역이 기근으로 허덕이던 1974년에 빈곤의 경제학적 측면을 연구하기 시작한 유누스는 전통적인 금융업자들은 고이율을 부과하기 때문에 영세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들이 작은 가게라도 운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돈을 쉽게 빌리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1976년에 방글라데시에 있는 영세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고안된 마이크로크레디트(영세민들이 담보 없이 받을 수 있는 소액 대출)라는 신용체계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주된 요인은 돈을 빌려주는 사람과 빌리는 사람의 ‘완벽한 소통’이다. 비록 25달러 정도의 소액대출이지만 기존의 제도권 금융기관에 축적된 신용데이터에 따라 돈을 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자본 회수에 대한 엄격한 판단과 상환의 의지를 심사해 대출이 이뤄졌고, 동네 단위의 ‘공동책임제’를 실시해 돈을 갚지 않는 경우 같은 동네의 이웃들이 상환하도록 하는 등 상환을 근본적으로 담보하게 한 것이다.
또 이 사업에 열정과 순수성이 있는 사회적 기업가들이 제도를 지속적으로 보완해 가면서 성공적인 모델로 발전하게 됐고, 방글라데시 정부는 그라민은행 프로젝트를 1983년 독립 은행으로 만든다. 이후 그라민은행 모델은 전 세계적으로 다른 형식의 소액 대출이 활성화되는데 박차를 가하게 되고,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2006년에는 유누스와 그라민은행이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방글라데시와 달리 우리나라는 자영업자의 ‘자본수익률’이 거의 나지 않는 상황이며, 원금 회수도 거의 불가능하고, 유누스의 성공 요인인 ‘정보의 비대칭성’ 해소와 진정성 및 열정을 가진 ‘사회적 기업가’ 부재 때문에 방글라데시 모델처럼 성공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이자 회수와 원금 상환에 대한 완벽한 관리 및 감독이 이뤄져야 하지만 한국의 금융기관은 기본적으로 부동산 대출로 성장해 왔기 때문에 세밀하게 대출자들을 관리·감독하면서 상환을 독려하는 시스템 자체가 허술하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연체정보 말고는 시장에서 돈을 빌려간 사람이 돈을 갚을지, 갚지 않을지를 판단할 능력이 우리나라의 금융기관에는 부족하다는 데 있다. 결국 단순히 돈만 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세밀한 관리와 감독으로 상환이 이뤄질 수 있도록 시스템화하지 않고 지금 시작한 미소금융처럼 기존의 은행 신용정보만으로 대출 여부를 판단한다면 지금까지 제도권 소액담보 대출과 전혀 다를 게 없고, 이에 따라 몇 년 지나지 않아 자본금은 고갈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관변단체 사업자 선정 부작용 우려
그러나 정부의 인식은 낙관적이다. 아직 시행 초기여서 혼란은 다소 있지만 대출 후의 철저한 관리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대출 과정에서 사업계획서를 면밀히 검토하고 현장 실사와 컨설팅을 통해 지속적으로 관리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또 “우리나라는 방글라데시와 달리 선진금융시스템이 있고 금융IT(정보통신) 분야에서 강점이 있기 때문에 방글라데시와 우리나라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강조했다.
유누스 박사가 성공적인 모델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소액 대출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치밀한 컨설팅뿐만 아니라 대출기관과 대출자의 정보가 100% 의사소통이 있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시스템뿐만 아니라 서민을 위한 소액서민금융이 성공하려면 유누스 박사와 같은 진정성과 열정을 갖춘 사회적 기업가가 사업을 주도해야 한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경실련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에 이러한 의지가 있는 사회적 기업가와 단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면서 “하지만 이번에 정부가 주도하는 미소금융 사업은 기존에 있던 진보 단체들을 전부 소외시키고 관치로 출발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가 서민들의 고충을 가장 잘 아는 지금까지 소액대출 사업을 해 온 민간 단체들을 제외하는 대신 대기업과 공룡 은행에 강제로 갹출해 재단을 만들고 정권의 입맞에 맞는 지역 사업자를 선정, 앞으로 200~300개의 민간 사업자를 선정한다고 홍보하고 있다”면서 “벌써부터 정부의 관변 단체들이 사업자 선정을 통해 정부예산을 빼먹는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즉 한 번도 서민을 위한 사업을 해 본 적이 없는 그들에게 진정성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며, 결국 자리만 만들고 그들에게 월급으로 나가는 돈이 수익보다 많아질 것은 자명한 이치라는 지적이다. 경원대 홍종학 교수는 “지금처럼 정권이 밀어붙이니까 억지춘향 식으로 시늉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진정으로 서민을 위한 사회적 기업가가 나오지 않는 한 이 같은 관치금융식 행정은 근본적으로 성공할 수 없는 데다 정부 주도사업에 편승한 진정성 없는 사업자의 참여는 필연적으로 부패하게 된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김태열 기자 yol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