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로 값 떨어진 건물 눈독… 국내 중고선박 매각 여부 타진도
“저기 보이는 저 15층짜리 건물(ㄱ)하고, 그 아래로 보이는 회색빛 건물(ㄴ), 그리고 큰 길 너머 은행 낀 저 건물(ㄷ)도 다 넘어갔다고 봐야죠. 국내 부동산 업자가 의사 타진을 하고 계약도 했지만, 전주(錢主)는 미국과 일본 기업이라는 게 이 바닥 분석이에요. IMF 외환위기 때처럼 해외 투기자본이 막 들어오는 거야.”
11월 26일 서울 강남의 뱅뱅사거리 일대와 테헤란로 인근에서 만난 공인중개업소 사장들은 “미국과 일본의 부동산 투기자금이 강남 일대에 급격하게 늘고 있다”고 전했다. 이곳 공인중개사에 따르면, 역삼동 소재지인 ㄱ건물은 대지 450㎡, 지상 15층, 연면적 4500㎡ 규모로,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어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가격이 300억 원 가까이 올랐다. 그러나 건설 경기가 침체하자 소유기업(건설회사)이 급매물로 내놓은 상태. 호가는 250억 원 아래로 떨어졌다는 게 공인중개사들의 말이다.
국내 대리인 내세워 실체는 안 드러나
양재역과 가까운 ㄴ건물도 연면적 2300㎡, 대지 500㎡, 지상 7층 규모로 지난해 100억 원대에서 올 상반기에는 130억 원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하반기 들어서면서 가격이 오히려 100억 원 밑으로 떨어졌고, 테헤란로 입구에 자리한 ㄷ빌딩도 지난해 말부터 상승세를 유지, 올해 최고 80억 원까지 올랐지만 사려는 사람이 없어 호가는 연일 하락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부동산 중개사들은 “모두 대로변에 위치해 있고 지하철역이 가까운 빌딩으로, 입지가 뛰어난데다 현재 입점해 있는 임차인들이 대부분 우량 업종이어서 투자 가치가 있는 빌딩”이라며 “하지만 요즘 부동산 경기가 안 좋은데 누가 사려고 덤비겠느냐? 결국 10년 전처럼 외국인들 몫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국내 부동산 투자자들이 머뭇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1997년 외환 위기 당시처럼 급매물로 나온 건물들을 외국 투기자본이 ‘이삭 줍듯’ 챙기고 있는 것이다.
유동성 위기에 처한 기업들이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사옥 등 건물을 시장에 내놓자 외국 투기자본이 이를 20∼30% 이상 떨어진 ‘헐값’에 거둬들이고 있다. 서울 논현동 소재 ㄹ캐피털의 한 임원은 “현재 강남권에 진입하고 있는 투기자본은 주로 원화 가치 하락으로 투자 여력이 생긴 일본 및 유럽계 자금들과 환헤지 상품에 가입하지 않아 오히려 환차익을 낸 일부 국내 수출업체”라며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이야 대부분 내국인이지만 그가 전주인 경우는 거의 없다”고 밝혔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미국계 자금의 ㄹ캐피털은 현재 국내에 약 3000억 원의 자금을 들여와 대구의 ㅁ쇼핑몰을 인수한 데 이어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의 한 쇼핑몰도 사들였다. 금융 위기의 피해가 적은 독일의 도이치은행과 기존에 조성된 메릴린치의 펀드도 부동산 시장을 주시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매수 의사나 상담이 서너 단계를 거쳐 들어오기 때문에 최종 매수자(전주)의 정체는 알 수 없는 실정이다. 현재 회생 절차를 밟고 있는 신성건설도 사옥을 시장에 내놓았는데, 국내 업체 두 곳과 일본, 미국 등 해외 업체 3곳에서 매입의향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신성건설 관계자는 “현재 각종 펀드, 강남브로커, 캐피털 등을 통해 의사 타진이 들어오고 있다”고 밝힌 뒤 “그러나 그 경로가 워낙 다단계로 복잡해 전주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보통 부동산개발업체라는 명함으로 의사를 타진해오고 있다”고 전했다. 신성건설은 현재 채권관리단과 법원의 결정이 나와야 자산을 매각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미리 여러 투기자본이 손을 대고 있는 모양새. 자산 매각 결정이 나면 이들의 경쟁은 가열될 전망이다. 주로 관급공사 위주로만 사업을 벌여와 다른 건설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금을 충분히 확보한 상태로 알려진 우림건설도 최근 서울 지하철 2호선 교대역 인근의 빌딩을 매물로 내놓고 매각 협상을 진행 중이다.
외국 투기자본이 노리는 상품은 강남의 100억 원대 오피스 건물이다. 최근 부동산 경기 불황 속에서도 강남에 있는 지상 5층 이상 오피스 빌딩은 나오기가 무섭게 팔려나가고 있다는 게 업계 이야기. 그중에서도 테헤란로 주변은 오피스 빌딩 투자자들에겐 최고의 노른자위 땅으로 불린다. 김요섭 제이엠투자산운용 대표는 “오피스 건물에 대한 투자수익률은 다소 떨어졌지만 강남 오피스 빌딩은 경기를 덜 타는데다 환금성이 좋아 매도 시 이익 실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외국 큰손 선주들 한국 벌크선 물색
강남 부동산에 이어 한국 선박도 해외 투기자본의 목표가 되고 있다. 세계 실물경기 침체에 따른 수출입 물동량 감소로 국내 해운업체들이 어려워지자 해외 선주들이 국내에서 매물로 나올 선박에 벌써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 해운업계와 선박 거래중개업체에 따르면, 최근 그리스 등 국가의 해운업체들이 국내 중개업체를 통해 한국 벌크선을 구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오고 있다고 한다.
선박 중개업을 주로 하는 한 업체 관계자는 “그리스와 유럽 해운회사 5~6곳에서 벌크 화물을 실어 나르는 6만~7만t급 선박을 구입할 의사가 있다고 알려왔다”면서 “이들 나라의 해운사가 조선산업이 발달한 나라 중에서 경기 탓에 놀고 있는 선박을 사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선주협회도 “최근 그리스·이스라엘 해운업계의 큰손들이 입국해 국내 해운업체를 대상으로 선박 거래 여부를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업계에 따르면, 올 상반기까지 해운 경기가 활황일 때 3만~4만t급 벌크선은 4000만 달러에 가격이 형성됐지만 최근에는 절반 가격에 내놓아도 매매가 이뤄지지 않는다. 해운리서치 회사들은 매주 발표했던 선가 평균치를 이달 들어 발표조차 하지 않고 있다. 선주협회 관계자는 “벌크선을 사려는 사람은 늘었지만 은행 대출금 때문에 배를 팔고 싶어도 워낙 가격이 낮게 형성돼 있어 매각 시기를 저울질하는 사람이 많다”고 업계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벌크선을 소유한 국내 해운업체는 대부분 선박을 살 때 금융회사에서 80%가량 선박금융(대출)을 받았다. 결국 벌크선 국제 가격이 지금처럼 반 토막 이하로 떨어졌을 때 선박을 팔면 돈이 남는 것은 고사하고 은행에서 받은 대출금도 못 갚게 된다는 얘기. 팔 수도, 그렇다고 배를 그냥 놀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처했다는 게 업계의 판단이다.
외신 등에 따르면, 10월 말 기준으로 전 세계 선박시장에서 발주를 취소한 건화물선(벌크선)은 154척. 해운업계의 공식적인 분석에 따르면, 발주 취소가 중국 조선소의 시설투자 감소 등 조선업 구조조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일부는 불황에 헐값으로 나온 중고 선박을 사들이기 위한 전략으로 판단하고 있다. “불황에는 발주를 취소하고 헐값에 나오는 선박을 사들였다가 신조선 시장이 위축돼 배가 부족하면 다시 고가에 파는 경우가 많다”는 선주협회 관계자의 말처럼 외환 위기 이후 해외 선주들이 국내에서 17만~18만t급인 케이프사이즈 선박을 6000만 달러에 사들였다가 나중에 1억5000만 달러에 되판 사례도 있다.
“국부 유출 막자” 업계 공동대응 움직임
때문에 해운업계에서는 “국부 유출에 대해 해운업계가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선주협회 관계자는 “해외 선주들은 우리나라 외환 위기 때 선박을 대량으로 저가에 구입했다가 몇 배의 가격에 되팔아 큰 재미를 봤다”면서 “최근 국내 업계가 침체에 빠지자 이들 선주가 과거의 경험을 재현해보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해운업계가 국부 유출을 막는다는 차원에서 공동으로 대응, 일시적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는 해운사를 돕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선주협회는 최근 업계의 유동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NH투자증권과 함께 자산관리회사를 설립했다. 164개 회원사 중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10여 개 회사는 선박자산관리회사에서 환매조건부로 배를 사들인다는 방침. 자산관리회사가 배를 사들여 용선해주면 급한 유동성 문제는 넘길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부동산 시장은 외국 투기자본의 범람이 더욱 거셀 전망이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아직 부동산이 저점을 찍지 않은 상태라 ‘조금 더 기다리자’며 관망하는 투자자가 많다”면서 “특히 외국 자본은 한국 부동산의 추락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유럽계 자산운용사 관계자도 “영국 런던, 호주 시드니 등의 부동산 가격도 크게 떨어진 만큼 글로벌 자금은 여전히 한국 부동산 시장을 지켜보자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부실 자산 매입을 추진 중인 한 캐피탈 임원은 “정부가 추진한 대주단 지원으로 건설사의 구조조정이 연기될 수 있어 급매물 출시가 지연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하지만 머지않아 본격적인 부동산 이삭 줍기 시즌이 도래할 것이며, 이미 외국인들의 자본은 ‘스탠바이’ 상태”라고 전했다.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