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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투기세력 ‘국내 내조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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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장은 외국자본의 좋은 먹잇감…
고수익 실현 환경 뒷받침 세력 존재

‘양털 깎기(Fleecing of the flock)’라는 말은 국제 투기자본의 은어다. 국제 금융재벌이 큰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의 하나로 경제 불황의 조작이 있는데, 그들은 먼저 신용대출을 확대함으로써 경제적 거품을 조장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투기에 집중하게 한다. 그런 다음 통화량을 갑자기 줄여 경제 불황과 재산 가치의 폭락을 유도한다. 그리고 우량 자산의 가격이 정상가의 10분의 1, 심지어 100분의 1까지 폭락하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나서서 말도 안 되는 싼 가격에 사들이는 것이다.

‘양털 깎기’는 바로 국제투기자금의 수탈 메커니즘을 뜻한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단지 이자놀이보다는 고의적인 불황을 만들어서 자본을 이동시켜 개인들의 재산을 수탈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이후 양털 깎기는 주기적으로 시장의 희생을 강요해왔다.

외환위기 만들어 ‘단맛’ 뽑아먹어
우리는 이미 10년 전에 이 양털 깎기를 당해봤다. 당시 금리는 20%대까지 치솟았고 주식, 부동산, 원화 가치 및 기업 가치까지 돈 많은 외국 자본에는 그저 줍는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이다.

“건실한 국내 은행을 은행과 금융당국이 국제 투기자본과 결탁, 헐값에 팔아넘겼다”는 의혹이 일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 사건은 지난달 24일 “합법적인 매각이었다”는 1심 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여전히 논란 중이다. 론스타와 공모해 외환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부실은행에 해당하는 6.16%로 고의적으로 저평가해 론스타에 최대 8000억 원대 이득을 얻게 한 혐의로 기소된 이강원 전 외환은행장과 변양호 전 재경부 정책금융국장 등은 무혐의 처리됐다.

IMF 외환위기 이후 국내 부실기업에 투자한 해외 자본의 사례는 외환은행을 인수했던 론스타, 진로의 부실채권을 인수했던 골드만삭스, 만도기계의 칼라일펀드, 이랜드월드의 와버그핀커스, 제일은행의 뉴브리지캐피탈, 굿모닝증권(옛 쌍용증권)의 H&Q와 IFC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2003년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할 당시 투자 원금은 2조1548억 원. 그간의 배당금으로 6000억 원대의 수익을 올렸고 일부 지분 매각 등을 합하면 투자 원금의 85.4%에 해당하는 1조8399억 원을 이미 회수했다. 나머지 지분 51%를 경영권 프리미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분할 매도하더라도 2조9000억 원(주당 8800원 기준)가량을 더 벌어들일 것으로 보인다. 지금처럼 금융 위기가 없을 때 조기에 매각했더라면 4조 원이 넘는 추가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최근의 외환위기도 이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강하다. 최용식 21세기 경제학연구소 소장은 외환시장의 공포감을 외국인들이 조성하고 또 그 단맛을 뽑아먹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 소장은 “외국인이 국내 주식을 매입하기 위해 들여온 총액이 222억 달러인데, 그들이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지고 있었던 총 자산가치가 2700억 달러가 넘었던 때가 있다”면서 “외국계 금융기관들은 이런 불안감·공포감을 조성해 가격의 폭등과 폭락을 유도해서 거기서 이익을 얻어내곤 했다”고 전했다.

최 소장의 지적처럼 한국의 외환위기를 먹잇감으로 겨냥하는 외국 투기자본이 몰려오고 있다. 특히 일본 금융계는 최근의 금융 위기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라며 M&A에 앞장서고 있는 모양새. 일본 정부는 11월 중순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국제통화기금(IMF)에 1000억 달러 융자를 제안했고, 이에 앞서 한·중·일 3개국 재무장관 회동을 주도해 중국 정부와 함께 한국에 외화 공급 규모를 늘려주는 방안을 협의했다. 일본은 나아가 800억 달러 규모로 창설이 추진되고 있는 아시아통화기금(AMF)에도 가장 많은 출자액을 내놓을 방침이다. 바야흐로 일본 자본이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 침투하는 분위기다.

2000년 이후 사회현상 투기자본과 관련
한국 시장에 침 흘리기는 중국 자본도 마찬가지다. 중국 자본 역시 IMF 외환위기 이후 영국과 미국 자금이 투하됐던 것과 비슷한 환경에서 투자를 저울질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4월까지 중국 자금의 국내 증시 투자 잔액은 지난해 말 대비 약 5배나 증가했고, 중국 은행감독위원회는 6월 자국 은행들의 한국 증시 투자도 허용했다. 10월 22일 중국에서 열린 ‘한국자본시장 설명회’에는 예상보다 많은 중국 기관투자자가 참석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기자본을 ‘1년에 25% 이상의 수익을 내는 경우’라고 이야기하지만 정확한 개념은 없다. 홍성준 투기감시센터 사무국장은 “정상적인 자본이라면 생산설비를 만들고, 노동자를 고용해서 물건을 만들고, 이를 시장에 내다 팔아 이윤을 남기는 것인데, 이런 과정이 없는 것을 투기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초단기 고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있는 설비를 팔아먹고,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00년대 이후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현상들은 거의 투기자본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국제 투기세력이 원하는 조건을 갖춘 나라”라는 지적도 있다. 미국의 월가와 영국의 더 시티에서 나오는 ‘한국 증시에 침 뱉기’성 발언의 취재원은 대부분 국제투자은행 등 세계적 규모의 초국적 투자기관, 헤지펀드 등의 전략가, 분석가 들이라는 것. 기자와 인터뷰나 자체 기관의 보고서 등을 통해 기사 자료를 수시로 제공하고 언론 보도에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그들은 다름 아닌 외환위기 이후 헐값에 한국 증시를 주워 담아 수백조 원의 차익을 남기고 셀(sell) 코리아로 이익 실현을 하고 있는 장본인들이라는 지적이다.

문제는 투기자본의 ‘전횡’을 막아야 할 정부와 경제팀이 시장과 국민의 신뢰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경제 컨트롤 타워가 반복되는 거짓말로 ‘양치기 소년’이 되었으니 외국 투기자본이 뛰어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라는 지적이다. “외신에 대한 대응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정부 관계자가 입조심하는 게 낫지 않냐” “한국 시장을 리서치하면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흘리는 말로 한국 정부의 정책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한 나라의 정책을 이렇게 공개해도 되는지 의문”이라는 외국 애널리스트들의 발언에 이르면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국내에 투기자본을 대변해주는, 그들과 내통하고 ‘떡고물’을 먹는 세력들이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홍 사무국장은 “일부 관료·변호사·학자·언론 등이 바로 투기자본의 동맹세력”이라며 “10년 전에야 정치자금을 사과박스로 이동했지만 요즘엔 펀드로 전달하고, 결국 이 펀드가 돈을 벌도록 국가 정책에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정인이 총체적 연출을 하지 않더라도 이를 뒷받침하는 세력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최근 정부가 은행의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강도 대책으로 꺼낸 지급보증안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받고 있다. 정부는 심각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지급 보증이 결정된 대부분 은행의 대주주가 외국계 투기자본이라는 점에서 “국민의 혈세를, 국가의 부를 투기자본들에 함부로 퍼주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일고 있다.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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