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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 북핵 문제'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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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북핵관련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북한 입장과 유사한 언급을 하는가 하면 국제적으로 미묘하고 민감한 내용을 직설어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호성을 유지해야 할 대목도 많이 쏟아냈다. 이에 대해 한쪽에선 "할 말을 한 것"이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대통령으로서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고 하는 등 평가가 엇갈린다. 하지만 양쪽 다 솔직하고 거침없는 발언이었다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포커스]노 대통령 북핵 문제'올인'

솔직하고도 거침없다. 북한 붕괴, 레짐 체인지란 말은 대북강경책을 구사하는 미국 당국자들도 잘 구사하지 않는다. 북한 당국도 기분 좋아할 것 같지 않다. 노대통령의 발언취지를 보면 '북한 붕괴를 원하는 나라, 정권교체를 원하는 나라는 미국과 일부 서구국가'라는 도식이 가능해진다. 북핵문제는 우리의 생존이 달려 있기 때문에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하며 군사-경제적 압박으로 풀려는 나라에 대해서는 '얼굴을 붉히는 일'도 감수할 것이라는 얘기다.

북한붕괴 문제를 놓고 중국과 한국을, 미국 등과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그룹으로 나눈 것도 지적을 받는다. '북핵문제는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풀어야 하며, 이를 위해 주변국들과 긴밀 협력하겠다'는 정도가 여태까지 우리 당국자들의 외교적 수사였던 데 비하면 노대통령의 발언은 대단히 파격적이고 구체적이다.

"중국이 돕고 한국이 원치 않기 때문에 북한 붕괴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 같다"는 노대통령의 폴란드 바르샤바 동포간담회 발언(12월 4일)도 이례적이긴 마찬가지다. "일부 강경론자들은 북한이 핵무기 개발의 시간을 끌고 있을 뿐이며 협상할 용의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우리 정부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는 브라질 일간지 인터뷰(11월 15일) 발언 역시 논란을 불렀다. 일부 국내 언론들은 이에 대해 대북정책과 협상에서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는 부적절한 언사라고 비판했다.

물론 북한에 대한 당부도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북한이 듣지 않으면, 끝내 핵무기를 개발해가는 상황이 진행된다고 하면 누구도 일을 장담할 수 없다"는 프랑스 발언(12월 6일)과, "북핵보유는 절대 용납할 수 없고, 국제사회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란 영국 BBC와의 인터뷰(12월 3일)가 그것이다.   

논란이 된 노대통령의 북핵관련 발언은 주로 해외 방문지에서 동포들을 상대로 한 간담회에서 나온 것이고, 외교안보 분야 참모들이 '사전 작성'한 연설문이 아니라 대통령이 즉석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한 것이어서 외교부 등 관계부처에서는 동포간담회를 '공포간담회'로 불리고 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발언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아 언론이나 해당국가에 취지를 해명하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북핵 관련 발언 시발점은 LA발언 북핵관련 발언의 시발점인 지난 11월13일 미 LA 국제문제협의회 주최 오찬연설만 해도 외교부가 전혀 간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략적 내용은 노대통령 스스로 결정했다는 후문이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칠레로 가는 도중 LA에 들른 노대통령은 작심한 듯 "북한의 핵이 자위수단이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라고 말해 미국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포커스]노 대통령 북핵 문제'올인'

노대통령은 LA 발언에 이어 APEC 기간에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11월 20일)에서도 이런 속내를 밝혔다고 한다. 이에 부시 대통령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우리 당국자들이 전한 정상회담 결과는 '북핵문제를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수단으로 해결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회담에서 노대통령이 부시대통령에게 "북한을 자극하는 표현을 삼가달라"는 요청을 했고, 부시대통령이 흔쾌히 수락했다는 얘기도 돈다. 한 고위당국자는 이에 대한 확인요청에 "정상회담 내용을 공개할 수 없다"며 언급을 피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 북핵 문제 해결을 정책 1순위로 해달라는 노대통령의 주문에 'vital issue'로 삼겠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우리 당국자들은 노대통령의 요청을 수용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는데, 일각에서는 '(생존이 달린)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임기 내에) 꼭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정상회담 후 노대통령은 "외교부 당국자들에게 식사를 한번 대접하겠다"며 회담성과에 대단히 만족했고, 권진호 청와대 안보보좌관은 "역대 최대의 정상회담"이라고 평가했지만 미국쪽 반응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특히 미국이 백악관 홈페이지 '대통령 소식과 연설' 항목에 중국, 일본과의 정상회담 내용을 소개하면서도 우리와의 정상회담 소식은 올려놓지 않은 점을 보면 우리 측이 회담성과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대목도 있는 것 같다.

미 국무부의 한 인사는 "한-미 정상회담은 미국 입장에서는 APEC에 참가한 각국 정상들과의 연쇄회동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부시대통령은 2기 외교안보 정책을 완전히 가다듬지 않은 상태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노대통령을 만난 것이다. 회담 시간도 우리측은 길지 않게 잡았는데, 한국측이 집요하게 요청해 40분 가까이로 연장됐다. 한국은 이 회담에 마치 나라의 운명을 건 것처럼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라고 털어놨다. 부시 대통령은 APEC 당시 숙소에서 머물고 있으면서 각국 정상들이 숙소를 찾아오는 방식으로 정상회담을 치렀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모 국가 외교관은 나중에 이 점을 들며 "'조공회담'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실토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 발언의 배경은 조기 6자회담 개최 노대통령의 일련의 발언들을 모아보면 북핵 해결을 위해 '올인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왜 그랬을까. 북핵 문제가 우리의 명운이 걸린 대단히 중대한 사안이긴 하지만 서둔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을 모르지 않을 노대통령이 다급하게 나선 데는 바로 북핵에 대한 미국의 의도를 감지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미국은 내년 1월의 이라크 총선과 부시 취임식 이후인 3월부터 북핵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 6자회담이 열려서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필요성이 대두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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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한-미 정상회담을 전후로 우리 당국자들이 자주 언급한, 북핵 해결의 한국 주도적 역할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북한을 설득해 6자회담에 참석시키기 위해 회담 분위기를 조성하고 북한 입장을 살려주는 발언들을 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북한은 노대통령의 LA발언에 대해 "적절한 발언"이라는 환영 논평을 내놓은 바 있다.

북한에 대해 회담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니 이것저것 재지 말고 빨리 6자회담에 나오라고 권고한 것도 된다. 회담 테이블 복귀 외에 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하지만 6자회담에서 우리가 적극적이고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커다란 외교적 부담을 떠안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미국이 본격 행동에 나설 내년 3월 이전까지 북한이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경우 그 다음엔 미국이 내놓는 방안을 우리가 강력하게 반대할 명분이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현 상황에선 6자회담을 열어도 아무런 결과물이 없이 공회전만 하게 될 것이며, 2기 부시행정부가 아직 나오지 않은 만큼 좀 더 시간을 두고 그의 정책정립 과정을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려 한다"는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발언(12월 4일)은 노대통령을 당혹스럽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한 당국자는 "북한이 벌주만 마시려 하고 있다.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차려진 밥상을 걷어차는 행위는 북한에도 결코 이롭지 않을 것"이라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노대통령은 지금 북핵문제와 관련해 중대한 '모험'을 하고 있고, 공은 현재 북한에 가 있는 셈이다. 북한의 반응이 대단히 주목되는 이유다.

김경은기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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