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이명박 시장과 손학규 지사가 행정수도 이전 문제에 대해 잘 대처하고 있다."
한나라당 일각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시종일관 반대입장을 견지해온 서울시와 경기도가 오락가락하는 한나라당보다 더욱 현명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 지도부의 신중한 대응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인 셈이다.
![[천도 논란]국민투표 제2의 '덫'인가?](https://img.khan.co.kr/nm/ContentsObject/7/7554_1_a1_1.jpg)
노 대통령 국회로 '공' 넘겨
국민투표 결정권을 국회로 넘긴 노무현 대통령의 6월 18일 긴급기자간담회 발언은 한나라당의 당내 상황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은 스스로 당론을 결정하고 논란해야 한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국민투표 추진은 탄핵처럼 덫에 들어가는 것"이라며 불과 3개월 전의 탄핵 악몽을 떠올렸다. 국민투표 여부를 당론으로 결정하라는 노 대통령의 힐난은 한나라당을 또 한 번 '사각의 링'으로 불러들인 셈이 됐다. 국민투표를 찬성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한나라당은 '탄핵 2라운드'를 맞이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일부는 이미 노 대통령의 덫에 빨려들어가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그냥 덥석 물었다간 탄핵사태와 같은 꼴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대통령 재신임 카드'과 올해 '탄핵 카드' 때문에 한나라당은 이미 '2패'를 기록하고 있다. '행정수도 이전 국민투표 카드'에 대해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박근혜 대표는 "당 대표 개인이 말할 것이 아니라 당에서 협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최병렬 전 대표가 대통령 재신임과 탄핵 과정에서 성급한 결정을 내린 것과는 대조적인 태도였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당론을 결정하라'는 노 대통령의 직격탄을 비껴가면서 여권의 무책임한 발언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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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에 유리한 여론조사 결과는 오히려 한나라당 지도부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당내에서 정면돌파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 소속 의원 66명이 성명을 내고 국민투표 실시를 요구했다. 전체 소속 의원 121명의 절반이 넘는 숫자이다. 당내 중진급인 이방호-이재오-박성범 의원 등이 앞장서고 있다. 국민투표 실시를 주장하는 한 인사는 "행정수도 이전만큼 호재가 없다"면서 "이참에 노무현 대통령의 독선을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투표 추진과 관련해 가장 주목할 만한 단체는 국가발전전략연구회(발전연)이다. 이재오-김문수 의원 등 당내 3선 의원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발전연에는 30여 명의 의원이 참여하고 있다. 발전연은 여러 단체와 연계해 범국민연대를 구성한 후 이전 반대집회를 개최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촛불집회도 검토하고 있다. 당초 6월 22일 열릴 예정이던 범국민대토론회는 여러 단체와의 조율 문제로 잠시 연기됐다.
소속의원 과반수 국민투표 주장
이명박 시장과 손학규 지사도 국민투표 실시를 주장하면서 외곽에서 불을 지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내 지도부는 여러 각도로 당론 결정 여부를 고민하고 있다. 강경파의 주장에 이끌려 국민투표 실시를 받아들였다가는 또다시 탄핵 국면과 같은 상황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만 하다. 국민투표 실시 당론이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탄핵처럼 여야가 운명을 걸고 맞서는 또 한 번의 올인게임으로 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국민투표 실시-여권의 대대적인 홍보-투표 결과 이전 찬성 결론'으로 이어지는 국면으로 또다시 당이 해체될 위기에 몰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당내 한 신중론자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당론을 정하는 순간 다음 대선에서 충청권을 아예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국민투표 실시를 주장하는 당내 한 인사는 "이번 총선에서 드러난 것처럼 어차피 충청권 민심은 여당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서 "거기에 미련을 둘 것이 아니라 대선이 오기 전에 수도 이전에 대한 결정을 얼른 내리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의 음모설'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엄청난 예산 규모로 불어난 행정수도 이전 비용 때문에 국민투표를 실시, '이전 반대' 결과를 확인한 후 이 문제를 훌훌 털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여권은 잠시 타격을 받겠지만 한나라당은 충청권에서 완전히 기반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안게 된다.
당-정갈등을 빚던 여권이 행정수도 이전 찬성으로 하나의 의견을 모아가고 있는 반면, 한나라당이 국민투표 찬성과 반대로 갈라지는 양상을 보이는 것도 왠지 불안하게 느끼고 있다.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은 "한나라당이 찬성인지 반대인지 공식 입장을 밝혀야 한다"며 한나라당을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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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미온적 지도부에 포문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해 그동안 박 대표 체제 지도부에 대해 숨죽이고 있던 비주류 인사들이 일제히 포문을 열고 나선 것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이재오 의원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행정수도 이전 논란에 대해 "당에서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 의원은 "당이 대표 한 사람의 대중적 인기에 목을 매는 꼴이 됐고, 당내 인사들은 대표 눈치보기와 줄서기에 급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홍준표 의원도 "지도부가 너무 순진하게 대응하고 있다"며 "야당은 야당다워야 한다"는 말을 거듭해왔다.
한나라당 내에서 지도부를 비판하고 나선 중심세력은 주로 수도권에 기반을 두고 있는 중진의원이다. 이들은 친 이명박계 인물로 분류되고 있다. 행정수도 이전 논란이 박 대표를 중심으로 한 지도부와 이 시장과 손 지사를 중심으로 한 비주류 간의 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한나라당은 섣불리 국민투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입장으로 몰리고 있다. 어떤 쪽으로 결론을 내리든 차기 대권주자들간의 감정의 골은 깊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과를 두고 서로 비난의 포문을 열 것이 분명하다.
행정수도 이전 논란은 한나라당 당내뿐만 아니라 여야간에도 대권을 앞두고 전초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 국민투표가 실시되든 않든, 행정수도 이전 논란은 2007년 대선 때까지 차기 대권을 결정짓는 이슈가 되기 때문이다. 탄핵이 참여정부의 여야간 1라운드 게임이었다면 행정수도 이전은 2라운드 게임이 됐다.
윤호우 기자 hou@kyum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