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법 부결 총력전으로 기울다 급선회 사직서 작성 대표에 위임

7월23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정세균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의원들이 부정투표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우철훈 기자>
의원직 총사퇴냐, 방송법 부결 총력전이냐.
민주당은 초강수의 두 카드를 들고 고민했다. 의원직 총사퇴가 더욱 강력한 카드였지만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미디어관련법 통과 이전에도 일부 의원들은 의원직 총사퇴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사퇴를 주장하는 의원들은 사직서만 내는 것이 아니라 보좌진을 철수하고 의원실을 비우는 실질적인 행위를 주장했다. 의원직 총사퇴 주장이 ‘정치적 쇼’가 아님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의원직의 거취가 달린 만큼 야당 의원들의 반응은 민감했다. 한 의원 측은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이야기해 줄 수 있지만 의원직이 걸린 만큼 의원의 뜻이 어떻다고 말할 수 없다”며 입을 닫았다.
최문순·천정배 의원 독자적 사퇴
일부 이견이 있었지만 민주당 의원 84명 중 대다수는 의원직 사직서를 작성해 정세균 대표에게 위임했다. 두 카드 중 의원직 총사퇴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국회의장에게 직접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정 대표에게 사직서 제출을 위임한 만큼 방송법 부결 총력전 카드를 버린 것이 아니다. 일단 정 대표는 7월24일 상징적으로 혼자 국회의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홍영표 의원은 “거의 모든 의원이 개인적으로 사직서를 써서 대표에게 냈다”면서 “나는 사직서에 이명박정권이 민주주의를 학살했기 때문에 사퇴한다고 적었다”고 말했다. 홍 의원은 “모든 의원이 18대 국회는 이제 끝났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 이럴 거면 한나라당이 1당 독재식으로 한번 해보라는 강경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당의 공식 방침과 달리 7월23일과 24일 이틀간 최문순·천정배 의원이 의원직 사퇴를 선언했다. 국회의장에게 사직서를 직접 제출한 것이다. 이들 의원은 ‘강경사퇴 수순’을 밟았다. 국회의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한 뒤 보좌진을 철수하고 의원실을 비우는 형식이다. 퇴로를 없앤 선택이다. 천 의원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고 원내에서 끝까지 투쟁하는 것도 생각해 봤다”며 “하지만 이명박 정권하에서 국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방송법 재투표와 미디어 관련법의 대리투표 논란은 ‘오히려’ 민주당의 선택을 어렵게 만들었다. 율사 출신으로 ‘미디어법 원천무효 투쟁’ 법률팀을 이끄는 김종률 의원은 7월 23일 헌법재판소에 효력정지가처분을 신청하고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김 의원은 23일 의원총회에서 “권한쟁의 심판 청구 후 의원직을 사퇴할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원칙적으로 당사자 자격을 상실해도 문제된 사안에 대한 헌법적 판단이 필요한 경우 판단하도록 되어 있지만 헌재가 이를 빌미로 당사자 자격이 없는 자의 청구라는 이유를 들어 청구를 각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의원직 총사퇴를 통해 의원직을 유지하는 의원이 없을 경우 방송법 부결을 이끌어낼 수 있는 헌재의 판결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7월 24일 오전 국회에서 의원 사직서를 제출하자 강기정 대표비서실장(가운데)이 김양수 국회의장 비서실장에게 대신해서 사직서를 제출하고 있다. <우철훈 기자>
미디어 관련법이 통과된 이튿날인 7월23일 오전의 민주당 의원총회는 의원직 총사퇴 대신 방송법 부결 총력전을 선택하는 듯했다. 율사 출신의 의원들이 연달아 공개 발언을 신청하며 방송법 재투표는 명백하게 일사부재의를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율사 출신의 우윤근 원내 수석부대표와 김종률 의원이 표결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민변의 김선수 변호사도 법적 근거를 조목조목 제시했다. 율사 출신은 아니지만 법사위 위원인 박지원 의원은 “제가 만주국 제6대 검찰총장 출신”이라고 농담하면서 “국회 사무처에서 제시한 표결불성립의 예를 속기록으로 보면 모두 그날 재투표하지 않았다”고 문제점을 제기했다. 역시 율사 출신인 유선호 법사위원장과 박주선 의원도 같은 논리를 폈다. 회의장 밖에서는 박상천 전 법무부 장관이 우윤근 수석부대표에게 법률적 부분을 조언했다. 치과의사 출신의 변호사인 전현희 의원도 김종률 의원과 법률적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의원 총회장에서 방송법 부결 문제가 부각되면서 민주당은 이 문제에 총력을 다할 것처럼 보였다. 이날 의총에는 전날 부상당한 몇몇 의원을 제외한 대다수 의원이 참석했다. 4선·5선급 의원들이 대거 의총에 참석했고, 문희상 부의장이 끝까지 회의를 경청해 뜻이 하나로 모아진 것으로 느낄 정도였다.
강행 통과 후 분위기 총사퇴쪽으로
하지만 공개 토론 막바지에 분위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최고위원인 박주선 의원이 의원직 사퇴를 비판하자 김충조 의원이 즉각 반발하고 나서면서 회의는 비공개로 바뀌었다. 이날 오후와 저녁 의원총회가 잇따라 열렸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오후에 최문순 의원이 독자적으로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의원직 총사퇴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홍영표 의원은 “의원직 총사퇴 의견은 원래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지만 단지 일부의 신중론 때문에 다함께 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간을 좀 끌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의원 사직서를 국회의장에게 즉각 제출해야 한다는 강경파, 의원 사직서 제출을 대표에게 위임해야 한다는 다수, 의원 사직서를 제출해서는 안된다는 온건파가 약간은 다른 목소리를 냈다.
22일 몸싸움에서 부상을 당한 강창일 의원은 23일 “며칠전에 최문순·이종걸 의원 등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의원직 사퇴 의사가 강했다”고 말했다. 강 의원은 당내 분위기에 대해 “미디어법 통과 이전에는 5대3 정도로 의원직 총사퇴 주장이 소수 의견이었다”고 말했다. 미디어법 강행 통과 이후 민주당의 분위기가 서서히 의원직 총사퇴쪽으로 옮아갔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3일 저녁 의총에서 민주당은 의원직을 총사퇴하되 다만 대표에게 의원 사직서의 제출을 일임하는 형식을 택했다. 24일 우윤근 원내 수석부대표는 의원직 사퇴 의사를 밝힌 의원들의 사직서를 정 대표에게 전달했다. 민주당은 이날 사직서를 제출한 의원의 수와 명단은 공개하지 않았다. 홍영표 의원은 “정 대표에게 사직서 제출을 일임했지만 오늘내일 중으로 급박하게 대표가 국회의장에게 사직서 제출을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닌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