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신당 창당, 어떻게 볼 것인가-유시민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읽었다. "매년 5-18을 맞이할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진다"로 시작하는 이 글은 월간 〈인물과 사상〉 7월호에 실렸다. 그런데 반복해서 읽을수록 내 가슴 한 구석도 상당히 답답해졌다.
먼저 드러내고 얘기를 풀어가자면, 필자는 호남의 지역감정과 영남의 지역감정을 평면적으로 비교하지는 않는다. 상당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방어적인 차원에서 전개하는 지역감정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공세적으로 펼쳐나가는 지역감정이 결코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상당한 피해의식'의 근거가 명확한 데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 근거의 정점에 5-6공 세력에 의해 저질러진 5-18이 놓일 것이라 판단된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하여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기준으로 호남인의 피해의식을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아마 그 기준의 차이로 인해 강준만의 글에서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다.
강준만은 유시민이 "호남 폄하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유시민은 민주당 구주류를 폄하하고 있다. 어떻게 '호남=민주당 구주류'라는 등식이 성립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등식화를 통해 강준만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더욱 의문이다. 반면 강준만의 '영남 폄하'는 글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영남의 정서를 '전두환'이라는 이미지로 묶어두고, 호남의 상황을 '김대중'으로 수렴시키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아직도 많은 영남 사람들이 김대중보다는 전두환에 더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민주당과 호남과 김대중은 분리되기 어렵다는 데엔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지금 영남 민심을 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라고 덧붙이고는 있으나, 강준만 개인에게도 민주당과 호남과 김대중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기는 마찬가지인 듯싶다. 그래서 5-18로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 아닌가.
'한나라당 개혁파'를 비판하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그들(구주류)이 지난 대선에서 저지른 죄가 아무리 크다 한들, 적어도 민주 진영의 입장에서 볼 때엔 광주학살 세력과 한 이불을 쓰면서 잠을 자고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뛰었던 한나라당 사람들의 죄보다 더 크진 않을 것이다." 어떤 '민주 진영의 입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민주 진영이라면 '민주당 구주류'와 '한나라당 개혁파'를 두고 그렇게 비교하는 수고는 하지 않으리라 판단한다.
신당 논의를 5-18로까지 이끌어가서 "영남=전두환, 호남=김대중"으로 설정하여 논리를 전개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수세적 지역감정과 공세적 지역감정을 나누어 접근한다고 한들 현재의 지역갈등 구도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구도가 계속 이어진다면 다음 선거에서도, 그 다음 선거에서도 논리의 시소게임은 가능할 것이다. 한편에는 한나라당을, 다른 한편에는 민주당을 올려놓고 차악(次惡) 선택을 요구하는 게임이야 많이 봐오던 것 아닌가. 그런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우리의 현실을 '분노의 정치'에 묶어두고자 하는 그 노력이.
〈인물과 사상〉 8월호에 실린 '중간파의 비판과 옹호'에서 강준만은 "3김정치 시대가 끝이 났다는데"라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왜 아직도 모든 것을 '김대중'을 중심에 놓고 평가하고 판단해야 하는가. 이제 '김대중'이라는 블랙홀로부터 빠져나와 그 다음의 정치 시대로 가자. 잘못된 민심에 영합하지 말고 그것마저 '계몽'으로 돌파하자. 왜? 그게 옳기 때문이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민주당을 지키면서 '통합신당'으로 가는 걸 누가 'DJ의 양자' 코스"라고 비난할 때만 "그 썩어빠진 두뇌를 청소하라고 가르치자. 그게 옳은 방법"이라고 주장하지 말고 언제나 그러했으면 좋겠다.
'그 다음의 정치 시대'를 열어젖힐 힘은 바로 희망이 돼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다.
/홍기돈〈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