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위스키, 애인. 영화 <소공녀>에서 미소는 이 셋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가사노동자(도우미) 일로 생활비를 간간이 충당하는 미소가 포기한 것은 ‘집’이다. 그는 세 들어 살던 단칸방을 빼고 집을 구해보지만 높은 집값을 감당할 수 없다. 결국 대학 시절 밴드를 함께했던 동기들의 집을 전전한다. 미소는 이들 집에서 임시로 지내며 요리, 청소를 하고 상심에 빠진 친구를 위로해준다. 호화주택에서 사는 동기 정미는 자기 집에 머물며 가사를 돕는 미소가 어느 순간 심기를 거슬리게 하자, 자신이었으면 술과 담배부터 끊었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일갈한다. “나는 네가 염치가 없다고 생각해.”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운 마음. 염치의 사전적 정의다. ‘○○인데 염치가 없어’에서 ○○의 자리는 공교롭게도 취약한 지위에 놓인 이들이 주로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쪽방촌에 사는 사람들의 고충을 담은 기사에 달린 댓글들에선 사진 속 거주민의 방 한편에 있던 소주병이 도마 위에 올랐다. 넉넉하지 않아 쪽방촌에 살면서 술을 사 마신다는, 염치가 없다는 질책이었다. 가난하지만 성실해야 하며, 피해를 겪었지만 무결해야 한다. 경제적 위기에 내몰리게 된 맥락, 사회적 돌봄 부재, 구조적 성차별은 가려진다. 공동체의 논의로 이어질 여지는 적다.
염치를 풀어 쓰면 청렴할 ‘염(廉)’, 부끄러울 ‘치(恥)’다. 청렴하지 못한 데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청렴함이 요구돼야 하는 공직자들에 대한 잣대는 오히려 느슨해지는 듯하다. 딥페이크 성범죄가 끊이지 않자, 정부·여당은 지난 8월 29일 긴급 당정협의회를 열었고, 지난 9월 4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긴급 현안질의에서는 여야 의원 할 것 없이 관계부처를 질책했다.
이 장면은 어딘가 기괴했다. 대선후보 당시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했던 윤석열 대통령은 여가부 장관 자리를 반년 넘게 비워 두고 있다. 각 부처의 정책에 젠더 관점을 반영하고 차별을 시정하는 주무부처의 힘을 빼놓고는, 부랴부랴 회의를 열어 ‘딥페이크 성착취물 1위 국가’ 불명예를 질책하는 것은 염치없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여가부의 내년도 디지털 성범죄 피해 대응 예산을 올해보다 31.5% 삭감해 편성했다.
노동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산재 사망률 1위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로 고용 형태에 따라 안전사고에 노출될 위험도 차이를 보인다. 에어컨 설치 기사인 27세 양준혁씨가 지난 8월 13일 폭염에 쓰러지고 방치된 끝에 숨진 사건은 ‘위험의 외주화’의 단면이다. 양씨가 속한 업체는 규모가 작은 회사로 원청 삼성전자가 설치업무를 도급으로 줬다. 지난해 산재 사망자의 78.9%가 이런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나왔다. 하지만 여당은 50인 미만 사업장에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2년 유예하는 안을 당론으로 하고 지난 6월 개정안을 발의했다. 윤 대통령은 ‘노동자 혐오’ 발언을 일삼은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을 임명했다. 죽음의 행렬을 끊어내지 못한 부끄러움을 모르는 듯하다.
<소공녀> 마지막 장면에서 미소는 도심 속 인적이 드문 곳에 텐트를 치고 산다. 염치가 없는 건 미소일까. 개인을 공동체 바깥으로 내모는 사회를 만든 사람들의 염치를 말하는 건, 영화 밖 우리의 몫이 아닐까.
<박하얀 기자 whit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