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국회에 처음 발의된 뒤 15년째 표류하고 있는 법안이 있다. 바로 차별금지법이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를 포함한 시민사회는 정치권이 사회적 합의를 핑계로 법 제정을 미루는 걸 막기 위해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인권운동사랑방 미류 활동가는 40일 넘게 국회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시민들이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문자를 의원들에게 보내는 운동도 이어지고 있다. 트랜스젠더 방송인 하리수씨는 지난 5월 11일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를 만나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지만 이 법이 적용되는 영역, 국가인권위원회 시정권고 수용률을 높일 수 있는 방안 등 세부적 쟁점에 대한 논의는 국회에서 본격화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5월 18일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를 만나 차별금지법의 구체적 내용, 향후 정치권이 논의해야 할 쟁점 등을 물었다.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앞장서온 홍 교수는 소수자 인권, 혐오표현·차별 등의 이슈에 꾸준히 천착해온 연구자다.
-국회에 계류 중인 4개 법안(박주민 의원이 대표발의한 ‘평등에 관한 법률안’, 이상민 의원이 대표발의한 ‘평등에 관한 법률안’, 권인숙 의원이 대표발의한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안’, 장혜영 의원이 대표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의 명칭을 보니 크게 차별금지법과 평등법 등으로 나뉜다.
“법안의 1차적 목적이 차별금지이니 차별금지법이 가장 직관적인 명칭이긴 하다. 평등법이란 명칭은 차별금지를 통해 지향하려는 가치인 평등을 강조하는 것이다. 국민에게 무언가를 금지해서 해결한다는 느낌을 주기보다 법 취지를 보여주는 데 방점을 찍으려면 후자가 적당한 명칭이라고 본다. 다만 어떤 명칭을 쓸지는 전략적 판단의 영역이다.”
-인권위가 2020년 발표한 차별금지법 시안을 보면 이 법은 고용, 재화·용역의 공급이나 이용, 교육기관의 교육과 직업훈련, 행정·사법 절차와 서비스의 제공·이용 등 4가지 영역만 규율하고 있다.
“헌법은 모든 영역에서의 차별금지를 규정하고 있지만 차별금지법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혹자는 이 4가지 영역을 공공 영역이라고 하는데 고용, 재화·용역의 공급이나 이용, 교육기관의 교육 등은 주로 사적 영역이다. 그래서 ‘공공성이 있는 사적 영역’이라고 보는 게 맞다. 차별금지법의 핵심은 이 사적 영역에서의 자유를 일부 제한하는 것이다. 중요한 전환이다. 예를 들어 음식점 입구에 ‘무슬림 손님은 받지 않는다’고 써붙여 놓으면 이렇게 장사해도 된다는 신호를 주기 때문에 제한 조치가 불가피하다. 사적 주체도 이 영역에선 협조를 해야 한다. 종교, 가족 등의 영역은 빠져 있어 부족하다고 여기는 분들도 있는데 꼭 그렇게만 볼 건 아니다. 4가지 영역에서 차별이 개선되면 다른 영역의 차별도 개선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에서 여성 목사 안수가 형식적으로나마 허용되는 흐름이 생긴 건 법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인식이 변했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이 직접 적용되지 않는 영역은 이렇게 간접적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풀어갈 수 있다. 회색지대도 있다. 종교기관이 대학을 만들었을 땐 당연히 법 적용을 받지만 종교 내부의 교육기관은 어떻게 되는지, 재화·용역의 영역에서 ‘1 대 1’로 하는 지극히 사적인 거래까지 적용할 건지 등에 대해선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 동네 탁구 동아리 같은 ‘단체’를 규율하는 조항을 만들자는 의견도 있다. 만약 모든 동아리가 무슬림은 회원으로 받지 않는다고 할 경우 가게에서 무슬림 손님을 받지 않는 것보다 파급력이 더 클 수 있다. 취미생활은 준필수영역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이런 쟁점들을 속히 논의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해 답답한 상황이다.”
-인권위 시안을 보면 차별 유형 중 하나인 ‘괴롭힘’의 세부내용에 혐오표현도 포함돼 있다. 모든 혐오표현이 법 적용 대상인가.
“우선 차별의 개념으로 접근해보자. 법은 차별 개념으로 직접차별, 간접차별, 성희롱, 괴롭힘 등을 열거하고 있다. 직접차별 조문만 있으면 나머지는 해석을 통해 차별의 일종으로 규정할 수 있다. 다만 국제적으로 차별의 개념이 넓어지다 보니 확대된 차별 유형을 입법으로 반영하는 흐름이 있다. 인권위 결정례가 쌓인 부분은 해석의 영역에 두지 말고 조문화하는 게 깔끔하다. 다음으로 혐오표현의 관점에서 접근해보면 광화문에서 ‘반동성애’를 외치는 건 혐오표현이지만 이 법의 적용 대상은 아니다. 고용 등 4가지 영역에서 혐오표현을 하면 차별의 하나로 간주되면서 이 법의 적용 영역으로 들어온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가 무슬림 직원에게 ‘무슬림은 다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했다면 직접적 불이익은 아니다. 하지만 해당 직원을 괴롭힌 것이니 차별로 보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현행 인권위법으로도 규율할 순 있지만 명시적 조문이 없다 보니 한계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혐오표현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차별금지법만으로는 사각지대가 생기는 것 같다.
“법을 집행하려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면이 있다. 일반적인 혐오표현은 차별금지법이 아닌 별도 입법을 통해 규제하는 게 맞다. 차별금지법에 그간 차별이라는 말로 포섭하기 어려웠지만 마땅히 근절해야 할 괴롭힘 같은 영역을 담는 것은 바람직하다. 다만 혐오표현은 차별과 연결돼 있긴 하지만 차별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차별금지법에 다 끼워넣는 건 법의 일관성·체계성 면에서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다. 대부분의 나라도 혐오표현은 별도의 법으로 다루고 있다.”
-기존 인권위법과 차별금지법은 어떻게 다른가.
“구제 차원에서 보면 인권위가 시정권고를 하는 것은 같다. 현재 권고 단계에서 많은 기관이 수용도 하지만 최종적으로 강제하려면 소송절차가 있어야 한다. 소송이 빈번해지는 게 좋진 않지만 (차별 피해자들이) 소송에서 이길 가능성은 늘 열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행위자들한테 ‘소송 가면 질 수 있으니 인권위 말을 듣자’는 동기부여가 생긴다. 기존 인권위법과 달리 차별금지법에는 가중적 손배배상, 입증책임 전환, 차별 피해자에 대한 소송 지원 등의 장치가 있다. 소송 지원은 권고가 수용되지 않을 경우 차별 피해자에게 소송 관련 재정 지원을 하는 것이다. 권고를 수용하도록 압박하는 효과가 있다.”
-차별금지법에 있는 보완장치들을 강력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나.
“대단한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차별금지법은 인권위법보다 더 강한 계기를 제공할 뿐이다. 그래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지금 보이는 반응은 과도한 걱정이자 너무 ‘오버’하는 측면이 있다. 실제 법이 제정된다 해도 특별히 많이 바뀌진 않는다. 소송 지원이야 말 그대로 비용을 지원하는 것이고, ‘손해액의 3~5배 배상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가중적 손해배상도 손해가 인정돼야 의미가 있다. 노키즈존 운영, ‘첫 손님이 여성이면 재수가 없다’며 승차거부를 한 택시기사 등의 차별로 인한 손해 입증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울러 법원은 차별과 관련된 손해배상 인정에 인색하다. 다만 차별금지법이 법원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재판부가 왜 불법이냐고 물어올 때 조직법의 성격이 강한 인권위법을 언급하면 다소 궁색한 면이 있다. 차별금지법이 있다면 왜 불법인지 좀더 명확해질 수 있다.”
-차별금지법에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차별시정 의무도 규정돼 있다.
“아주 큰 의미가 있다고 보긴 어렵지만 정부가 적극적으로 차별금지 노력을 하려고 할 때 힘을 받을 순 있다. 법률적 근거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재 법무부에 인권국이 있는데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차별금지국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만들어질 여지가 생긴다. 지자체에서 관련 조례를 만드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4가지 법안이 큰 차이가 있나.
“대동소이한 편이다. 다만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에는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3000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는 내용 등이 더 들어가 있다.”
-국회에서 아직 차별금지법 공청회 일정조차 잡지 않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의 열쇠를 누가 쥐고 있다고 보나.
“결국 열쇠는 167석을 갖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이 쥐고 있다. 왜 차별금지법 제정이 안 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예전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랬다고 답했지만 이젠 틀린 답이 됐다. 정치권이 법을 제정하려는 의지가 부족해 그렇다. 절박하게 입법 필요성을 느낀다면 세부적 쟁점을 궁금해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정치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최근 갤럽, 리얼미터 등의 여론조사 결과만 봐도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는 비율이 더 높게 나오지 않나. 여기까지 분위기를 끌고 온 건 정치권이 아닌 시민사회의 힘이다. 이렇게 차린 밥상에 정치권이 숟가락 하나 올려놓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사회적 합의를 핑계 대는 건 더 이상 말이 안 된다. 정치전략상으로 볼 때도 민주당이 차별금지법에 미온적인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전에 노무현 정부 때 국가보안법을 건드리려다 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는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그런 상황도 아니다. 중도는 ‘이런 법 정도는 있어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고, 민주당의 왼쪽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절실한 과제로 보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이 두 그룹의 지지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