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인권을 스스로 준수할 의무뿐만 아니라 제3자로부터 보호할 의무도 있다.
지난해 9월 유엔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WGEID)은 국내 사할린 징용자 유족들의 요청으로 러시아 정부에 백봉례 할머니의 남편인 신경철씨를 비롯해 징용자 25인의 생사와 행방을 묻는 서한을 보낸 데 이어 유해송환을 권고했다(A/HRC/WGEID/122/1). 유엔의 인권 전문기구에서 이 문제를 가장 중대한 인권침해 중 하나인 강제실종(enforced disappearance)으로 확인한 것이다.
국제법상 강제실종은 국가가 사람을 납치, 구금한 후 이를 확인해주지 않거나 잡아간 사람의 생사와 행방을 숨기는 범죄행위를 뜻한다. 법의 보호에서 벗어난 강제실종 피해자는 고문, 학대, 강간, 살해 등에 노출되고, 그 가족들도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국제법상 일본·러시아의 책임
강제실종의 역사는 길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의 ‘밤과 안개(Nacht und Nebel)’ 명령에 따라 점령지 주민들은 한밤중에 독일로 잡혀가 ‘안개’가 됐다. 강제실종이 법적 인권침해로 정립된 계기는 1970년대 중남미 군사정권의 조직적인 반체제 인사 납치·살해였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만 ‘실종자(desaparecidos)’가 3만명에 이르렀다. 이중 수천명은 마취된 상태로 군용기에 태워져 대서양 상공에서 내던져졌다.
1980년 유엔 인권위원회는 아르헨티나의 인권문제를 다룰 전문기구를 두려 했는데, 아르헨티나의 반대로 대상 국가를 명시하지 않고 전 세계의 강제실종을 다룰 수 있는 WGEID가 대신 생겼다. WGEID는 1970년대 후반에 주로 발생했던 아르헨티나 강제실종 사건을 주요 조사대상으로 삼았고, 이후 1945년 10월 24일 유엔 출범 이후 개시된 모든 강제실종 사건을 다루게 됐다.
강제실종은 그 법적 정의에서 알 수 있듯 피해자가 수십년 전에 사망했더라도 생사와 행방이 확인될 때까지 위법상태, 범죄행위가 계속된다. 그래서 WGEID는 1950년경 국내 가족들과 서신 교환마저 끊긴 채 사할린 억류 중 사망한 한인 징용자들의 진실규명과 유해송환을 촉구한 것이다.
얄궂게도 이렇게 유용한 국제법과 인권규범은 전쟁을 통해 발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승전국들은 전쟁 재발의 방지를 위해 오늘날 유엔과 국제사법재판소(ICJ)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국제연맹과 상설국제사법재판소(PCIJ)를 창설했고, 러시아 공산혁명을 반면교사로 삼아 국제노동기구(ILO)를 통한 노동자들의 보편적 권익 보장에 나섰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들이 세운 유엔은 자위권 행사 외의 무력사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했고, 파시스트 정권들이 국내에서 개인의 존엄을 짓밟는 전체주의 체제 구축 후 침략전쟁에 나선 것을 되새기며 모든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확인하는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다.
사할린 한인 징용자들은 일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냉전과 소련 전체주의의 복합적 피해자였다. 일본은 1930년대 말 중일 전면전 돌입에 따른 징병 확대로 전시 경제체제 유지를 위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식민지 조선인의 징용에 나섰고, 수만명이 당시 일본령이었던 남사할린(가라후토)으로 끌려갔다. 그럼에도 일본은 사할린 탄광 등에서 가족과의 연락마저 제한된 사실상 감금 상태에서 참혹한 노동을 강요한 것에 대해 강제노동협약(ILO 협약 제29조) 등 국제법 위반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당시 일본 정부와 기업들의 행위는 전쟁범죄, 반인도범죄에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한편 1945년 일본의 패망 이후 남사할린을 점령, 병합한 소련의 국제법상 책임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당시 사할린 억류 한인은 미국의 일본인 우선 송환 정책에 따라 귀국이 늦어졌고 한반도 전쟁 발발로 발이 묶여버렸다. 이러한 전후 정세를 감안하더라도 소련이 이후 수십 년간 북한의 외교적 반발 등을 이유로 일제 징용 이전의 조선인 이주자를 포함한 사할린 한인들의 한국 귀환을 막고, 가족과의 연락마저 차단한 것은 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비인도적 조치였다.
소련은 유엔 창설국이자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보편적 인권 존중의 의무가 있지만 1948년 유엔총회가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에서 확인된 신체와 이동의 자유, 통신의 자유, 가족결합권을 완전히 무시했다. 심지어 1976년 7월에는 동서 데탕트를 계기로 한국행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던 도만상, 황태룡, 유길수, 이창남, 김일수 등의 일가족 40명을 붙잡아 북한으로 추방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소련은 1991년 해체됐지만, 그 승계국인 러시아에는 전후 사할린 한인의 억류와 강제실종, 가족의 강제분리(enforced separation of families)가 낳은 국내 유족들의 한을 풀어줄 책임 있는 자세가 요구된다.
한국의 보호의무
국제법은 이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피해자 배상을 요구한다. 1990년대 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운동을 지원했던 네덜란드의 테오 반보벤이 골격을 잡아 2005년 유엔총회가 결의 60/147호로 채택한 유엔 중대인권침해 피해자 배상권리 기본원칙은 피해자들의 사법 접근권, 배상권, 정보 접근권을 확인했다. 특히 배상(reparation)에는 금전배상(compensation)뿐만 아니라 진실규명, 공식사죄, 피해자 추모, 역사교육, 유해송환 등 비금전적 조치도 포함된다.
한국은 사할린 징용자 문제에서 가해자는 아니다. 그러나 국가는 인권을 스스로 준수할 의무뿐만 아니라 제3자로부터 보호할 의무도 있다. 특히 국내 유족들의 국적국으로서 한국은 WGEID 권고의 이행을 위해 러시아와의 적극적인 교섭과 협력에 나설 책임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설립된 연합국 전쟁범죄 조사위원회(UNWCC)는 독일과 일본의 잔학행위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전범 처벌의 법적 근거 연구까지 병행해 전후 뉘른베르크 및 도쿄 재판을 비롯한 전범의 사법적 처벌에 기여했다.
아쉽게도 당시 한국은 정부 수립이 늦어져 진실규명과 형사처벌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사할린 한인 문제 등 일제강점과 침략전쟁에서 비롯된 중대한 인권침해를 조사해 국제법 위반을 확인하고, 해외 유해를 식별, 발굴, 송환할 상설 국가기구를 둘 필요가 있다. 아울러 역사적 사실이나 법적 책임 문제에서 가해국과 이견이 있으면, ICJ 재판이나 국제중재, 유엔 인권기구 회부 등 (준)사법적 절차를 통한 문제해결도 강구할 수 있다. 이러한 건설적 접근방식은 단순한 감정적 화풀이나 민족주의 조장이 아닌 보편성을 가진 역사 인식과 인권 의식, 국제법 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다.
<신희석 연세대 법학연구원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