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일담식 추모를 넘어서야 하는 이유
황해도 장산곶의 장수매는 한 해에 두 번 사냥한다. 이 매는 사냥 전날 ‘딱’ ‘딱’ 하고 자기 둥지를 부쉈다고 한다. 목숨을 건 싸움을 하기 위해서다. ‘딱’ ‘딱’ 소리가 들리면 장산곶 사람들은 방바닥을 두들기며 매를 응원했다. 드디어 높이 날아오른 장산곶 매는 깜깜한 밤하늘마저 ‘딱’ ‘딱’ 하고 쪼았다. 그러자 하늘이 뚫리며 별이 하나씩 생겨났다.
장산곶 매처럼 산 ‘백발의 투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지난 2월 15일 타계했다. 민주화·통일·노동 운동가, 민중예술가, 시인, 이야기꾼…. 그의 여든아홉 해 삶은 한 단어로 축약하기가 어렵다. 남북통일을 꿈꿨지만 그의 통일론은 ‘민중이 주인되는’ 혁명에 가까웠다. ‘무지렁이’를 스승 삼은 사상가였으며 우리말을 지독히 고집한 문필가였다. 그리고 그는 생애 마지막까지 거리에서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했다. 밤하늘에 별을 내는 ‘부리질’을 멈추지 않았던 백기완. 그의 발자취가 지금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백기완의 마지막 10년
칼바람이 불던 지난 2월 17일 저녁,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건물 한편에 촛불을 든 사람들이 모였다. 쌍용차, 기륭전자, 세종호텔, 유성기업, 콜텍, 코레일, 삼성전자서비스 등의 해고·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백기완 선생은 비정규직 차별, 부당해고, 노조와해 공작으로 하나같이 지난한 싸움을 벌였던 노동자들과 말년을 함께했다. 이날의 문화제 주제는 ‘백기완, 마지막 10년의 동행-비정규직·해고노동자’. 단상에 선 노동자들은 저마다 집회·농성 현장에서 백기완 선생과 쌓았던 추억을 꺼내며 작별인사를 했다.
“현장에서의 생존을 넘어 이 사회를 바꾸는 싸움이어야 했는데 코앞 작은 이해에 노동자 계급의 큰 뜻을 자꾸 까먹는 것 같아 죄송했습니다. (중략) 선생님 영전에 정말 송구합니다.” (김정우 쌍용자동차 노동자)
1933년 태어난 백기완 소장은 일제 식민통치와 분단, 한국전쟁, 독재, 민주화, 신자유주의의 물결과 비정규직 양산을 모두 겪은 한국 현대사의 증인이다.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시작으로 반독재 싸움에 헌신했고, 숱하게 옥고를 치렀다. 1979년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때는 잔인한 고문에 81㎏의 몸무게가 38㎏이 됐다고 한다.
당시 독방에서 쓴 시가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의 원작인 ‘묏비나리’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중략)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마라 (중략)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필기도구가 없어, 입으로 지어 피로 썼다고 한다.
백 선생은 1987년과 1992년엔 민중 대통령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 시민들의 모금으로 방송연설도 했다. 지금은 유명해진 많은 진보 인사들이 당시 ‘백선본’(백기완 선거대책운동본부)에서 일했다.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당시 그의 연설, 선거 포스터 등을 공유하며 그를 추억한 이유다.
반독재·민주화 운동 시절의 일화들이 주로 부각되고 있지만, 그의 문제의식은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제도적 민주주의를 성취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전진했다.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다가 죽음에까지 이르는 현실에 대해 그는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썩어문드러진 독점 자본주의를 뒤집어엎어야 한다.”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글귀 역시 ‘김진숙(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김미숙(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힘내라’였다.
80년대 후일담 추모를 넘어서
백기완 선생은 민주화 이후 다른 재야 원로들과는 다른 길을 길었다. 민주노총 지도위원이기도 한 한진중공업 해고자 김진숙씨는 한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야인사들은 많이 계셨죠. 그런데 김영삼·김대중 정권 들어서면서 노동자에게 적대적으로 돌아선 분들이 많습니다. 우선은 정권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중략) 그러면서 노동자들이 고립된 역사가 있는데, 백 선생님은 늘 한결같이 그 자리에 계셔주시는 큰 산이셨습니다.”(뉴스타파 <목격자들-불쌈꾼 백기완>)
지난 2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은 백기완 선생 조문을 왔다가 장례위원회로부터 “노동자들의 삶이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으니 해결에 나서달라는 게 선생님의 뜻”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어 “노동존중은 어디로 갔습니까?”(김수억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대표)라고 말하는 노동자들과도 마주쳐야 했다. 백기완 선생의 빈소여서 가능했던 장면들이다.
백 선생이 마지막까지 시대와 불화했기에, 80년대 후일담식 추모 분위기를 두고 일부는 불편함을 표하기도 한다. “실제로는 철저히 자본주의적 삶을 지향하면서 머리로는 자신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일부 진보세력을 비판해온 김규항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전혀 달라진 생각으로,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이 백기완 선생과의 추억의 사진을 꺼내들면서 옛날의 영광을 얘기하는 것이 후배세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다. 사적으로 인연을 되새기는 것은 존중하지만 공적인 차원의 추모는 달라야 한다. 기억하겠다고 약속한다면,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를 얘기해야 한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는 “백기완 선생은 나중에 영화를 누린 다른 민주화 세력들과 달리 영원히 거리에서 싸우다 가셨다”면서 “소수만 잘 사는 헬조선 체제가 아니라 모두가 잘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걸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먹물이 아니라 민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자 하셨다”고 말했다.
백기완 선생은 속된 말로 ‘조선 3대 구라’로도 불렸다.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백기완 선생은 한번 시작하면 10시간도 얘기할 수 있었다. 그의 입담엔 특징이 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였고, 살아온 얘기였고, 무엇보다 재미와 감동이 있었다. 나는 ‘국보급 구라’라고 불렀다”고 회고했다. 장준하 선생이 백기완 선생과 1974년 함께 투옥됐을 때 장 선생은 수사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백기완 때려죽이지 말라. 백기완은 민족문화, 민중문화의 보고(寶庫)다.” 달동네·동아리·새내기·모꼬지란 말을 처음 만들어 쓴 이가 백 선생이다.
백기완의 이야기와 글은 그의 신념을 관통한다. 그는 생전에 무지렁이가 자신이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장산곶 매>, <이심이 이야기>, <달거지 이야기> 등 그가 남긴 구전문학은 엄마, 할머니, 언니, 동네 어르신 같은 ‘위대한 무지렁이’들에게서 들었던 것들이다. 그는 생전에 “공자 왈 맹자 왈은 다 기록돼 있는데 민중의 이야기는 아무도 기록을 안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마지막 책 <버선발 이야기>에 담긴 뜻
그가 2019년 낸 <버선발 이야기> 역시 집안 어르신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요체이지만, 그는 여기에 자신의 사상을 집약했다. 9시간이 넘는 심장 수술을 받으면서도 그는 이 원고를 끝까지 매듭지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평생을 ‘가진 자’들에 쥐어짜인 어머니를 둔 버선발(벗은발·맨발)에겐 신비한 능력이 있다. 그가 발을 구르면 바다가 없어지고 땅이 생겼다. 버선발은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작대기를 꽂아 땅을 각자 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버선발은 곧 절망하고 만다. 사람들은 한뼘 더 가지기 위해 싸우고 죽였다. 친지를 동원해 나라를 만드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작대기를 아예 꽂지도 못한 이들도 있었다. 게다가 그는 정작 어머니를 위한 땅은 따로 챙기지도 못했다. 절망 속에서 버선발은 깨닫는다. ‘내 거’라는 생각, ‘나부터 잘살겠다’는 욕심이 문제임을. 그래서 그의 사상 노나메기는 “너도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다. 선생은 ‘너도나도 잘살되’ 뒤에 따라붙는 ‘올바로 잘산다’를 강조했다. 그리고 “올바로 잘산다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인간이 (자기 안의) 인간이 아닌 것을 깨뜨리고,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것 그것이 올바로 잘사는 것이다. 깜깜한 밤을 깨뜨리려는 스스로의 노력이 있어야 올바로 살 수 있다.”(2019년 KBS 인터뷰)
버선발의 일화는 인간 백기완의 이야기와도 닮았다. 그와 함께 싸웠던 과거의 동지들 상당수는 그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언제까지고 광야에 머물렀다. 선생은 과거의 동지 중 누구에게도 왜 땅 욕심을 부렸느냐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올바로 잘 살고자 한평생 ‘부리질’을 했을 따름이다.
깜떼(절망) 같은 밤하늘에 별을 내던 장산곶 매를 얘기하며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했던 백기완 선생. 그는 5일간의 사회장을 거쳐 지난 2월 19일 마석 모란공원에 안치됐다. 평생 어머니를 그리워한 그는, 늘 지니던 흰 손수건을 흔들며 고향에 가고 싶어했다고 한다. 유족은 이 손수건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