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3년 유예 방안 논의 중… 대공수사권 이관이 핵심
법은 한 번 바뀌면 과거로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대의기구인 국회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해 11월 국가정보원이 낸 자체 개혁안은 상당히 후한 평가를 받았다. 기관의 명칭을 ‘대외안보정보원’으로 바꾸고 대공수사권을 떼어내는 등의 내용을 담은 국정원법 개정으로 개혁에 못을 박겠다는 의지가 담겼던 것이다. 외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가 낸 안을 수용한 결과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국회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점도 있다. 국정원 개혁이 가시거리에 들어오려면 먼저 법이 바뀌어야만 하는 건 아이러니다.

10월 31일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가정보원에서 국회 정보위원회의 국정원 국정감사가 열리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국정원 개혁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부터 주요 공약사항 중 하나였다. 국내 정보 수집기능을 폐지한 것은 현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 내부의 조직개편에 따라 빠르게 이뤄졌다. 대북 또는 해외 정보 쪽으로 인력을 재배치한 것이다. 남은 과제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대공수사권을 이관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11월 1일 국회에서 가진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국정원은 국내 정보를 폐지하는 등 스스로의 노력으로 개혁을 추진해 왔다”며 “국회가 국정원법 개정을 마무리해 국민의 정보기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밝힌 것도 국정원 개혁을 마무리할 역할이 국회로 넘어갔음을 드러낸 부분이다.
문제는 여야 모두 국정원법 개정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 있다. 표면적으로는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돼 안보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자유한국당이 개정안 통과에 반대하고 있고, 더불어민주당은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정보기관의 권한을 통제하는 방안인 만큼 개정시기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바른미래당이 일종의 중재안을 내자 민주당과 한국당 모두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쪽으로 논의 지형이 움직이고 있다. 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의 중재안은 단순하다. 국정원법 개정을 3년 뒤로 유예하자는 제안이다.
한국당 반대·민주당도 미온적 태도
물론 여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한국당이 줄곧 반대 입장을 고수하면 법 개정은 불가능하다. 특히 남북관계에서 긴장이 완화되는 국면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시기를 틈타 공안·안보사범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 한국당의 인식이다. 지지층을 규합하는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국정원의 대공수사 기능을 지켜야 한다는 한국당의 목소리가 쉽게 꺾일 가능성은 낮은 셈이다.
이에 맞서는 여당은 겉으로는 야당의 반대가 심하다면 우선 법안 통과는 유예할 수 있다는 입장도 내비치고 있다. 국회 정보위 여당 간사인 김민기 의원은 정보위 국정감사 브리핑에서 “아직 합의가 된 건 아니지만 (개정안 처리가) 민주당 입장에서는 많이 유예된 것인데, 그렇게라도 해서 결국엔 국정원법을 바꿔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라며 “현재까지 여야 논의는 대공수사를 국정원이 일단 하고 최종 단계에서 다른 기관에 넘기는 안으로 의견을 모으는 중”이라고 밝혔다. 민주당 내 의원들 사이에서도 지금 당장 바꾸기는 어렵지만 2020년에 열리는 21대 총선에서 승리한 뒤 다시 개정을 추진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나온다.
하지만 여당과 정부의 속내는 다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이기 때문에 과거 정부에서도 국정원이 수집한 국내 정보는 정권 핵심부가 활용할 수 있는 양질의 자산이자 무기였다. 현 정부 들어 국내 정보 수집기능이 사라지면서 국정원에 의존하던 국내 정보 중 상당 부분이 활용하기 어렵게 됐는데 수사기능까지 폐지되면 스스로 쥘 수 있는 무기를 버리는 셈이 된다는 관측이다. 국정원 출신의 한 인사는 “최근 남북관계에서 국정원의 역할이 크게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국정원 내부에서도 수사권 유지에 매달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라며 “반대로 외부에서, 그러니까 정치권에서 여당은 권력 유지를 위해, 야당은 언젠가 미래 집권 이후를 위해 (수사권만이라도) 현상유지를 해놓는 게 낫지 않으냐는 주장이 많이 들린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단체 “의원들 직무유기” 비판
여당 내부에서도 비슷한 속내를 내비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정보위 소속의 한 여당 의원은 “지금 계류 중인 국정원법 개정안도 대공수사권 이관 관련 내용은 법안 통과 후 3년까지 유예하도록 할 수 있으니 그럴 거면 법안 통과 자체를 유예해도 되지 않느냐는 공감대가 만들어졌다”며 “그럼 이왕 유예하는 김에 일단 수사권을 쥐고 있는 국정원을 최대한 통제하는 역할은 집권 정부와 여당이 맡아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개혁이 미뤄지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최대한 국정원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논란이 되고 있는 대공수사권 이관문제는 국정원이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국정원 개혁발전위와 산하 적폐청산TF를 통해 지난 정권에서 저지른 국정원의 ‘15대 적폐’ 내역을 조사하고 개혁안을 제안하게 한 결과 남은 과제 중 하나이다. 서울시공무원 간첩 증거조작사건 등 대공수사라는 미명으로 공권력 남용을 통제하지 못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온 결정이다. 주요 국가들의 정보기관이 국내·외 정보수집 활동 외에 별도의 수사권을 갖고 있는 경우는 없다는 지적도 작용했다. 게다가 수사권 이관은 국정원 스스로도 내놓은 개혁안에 따라 향후 조직개편 등의 방식을 써서 되돌릴 수 없게 법을 고치는 영역에 속하므로 상징적 의미도 크다.
여기에 사실상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에 대한 수사 역시 이미 경찰이 더 많은 사건을 처리하고 있으므로 국정원이 수사권을 유지할 명목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법무부 자료를 보면 2008년부터 2017년 7월까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입건해 검찰로 송치한 사건 총 739건 중 경찰은 71%(531건)를 처리한 데 비해 국정원은 25%(187건)만 담당했다. 경찰이 국정원보다 3배가량 대공수사건을 처리하고 있으므로 수사 공백이 발생할 여지도 크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명확한 합의는 없지만 여야가 법안 처리를 유예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는 중이기 때문에 국정원 개혁을 촉구하는 시민사회 쪽에서는 국정원법 개정을 서두르라고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국정원법 개정안의 핵심 내용이 대공수사권 이관이지만 국정원의 국회 자료제출 및 증언 의무나 예산 투명성을 강화하는 등 감독과 통제를 위한 개혁안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여야가 법안심의조차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지적이다. 참여연대 행정감시센터 소장 장유식 변호사는 “여야가 3년간 유예하는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상 국회가 국정원 개혁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라며 “민주당은 집권여당으로서 책임성 있게 국정원법 개정에 나서야 하고, 자유한국당은 과거 한나라당 시절 국정원의 국내기능 폐지, 수사권 폐지를 당론으로 채택한 바 있는 만큼 국정원 개혁을 가로막아서는 안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