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

‘한반도 평화시계’는 차근차근 간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한반도 평화국면을 맞아 문재인 정부 2년차 이후 풀어야 할 국내외 과제들

문재인 정부의 집권 첫 해 기말고사 답안은 남북정상회담의 판문점 선언이 장식했다. 지금까지의 채점 결과를 국정지지율로 판단한다면 높은 성적을 거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크고 작은 시험은 앞으로도 꾸준히 남아있다. 남북정상회담이 다가오는 북·미 정상회담의 ‘길잡이 회담’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판문점 선언에서 등장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완전한 비핵화’ 등의 열쇳말을 하나하나 집권 2년차 이후의 새로운 과제로 풀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대북·외교관계뿐만 아니라 평화국면을 맞아 변동할 국내 정치상황까지도 함께 챙겨야 할 숙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공동선언문에 서명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공동선언문에 서명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2007년 남북정상회담 분위기와는 달라

문재인 정부가 임기를 시작한 지난해 5월 이후 한반도 안보상황은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지난해 7월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급 화성 14호를 발사한 것이 대표적이다. 서로를 향해 강한 어조의 비난을 쏟아낸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한국 정부의 입지는 크지 않았다. ‘운전자론’을 내건 대북·외교노선은 ‘코리아 패싱’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벌어지는 동아시아에서 ‘균형’과 ‘조정’을 강조하며 실질적으로는 현상유지에 중점을 뒀던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과 큰 차이를 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한반도 운전자론’은 미·중 강대국 간의 균형이나 조정을 통해 생존을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스스로 키를 잡겠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의 소유권을 포기해서는 안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문 정부의 첫 해 남북·외교관계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정철 숭실대 교수(정치학)의 말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과 참여연대가 5월 3일 ‘문재인 정부,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주제로 개최한 문재인 정부 1년 평가 토론회에서 이 교수는 ‘균형’을 이끌어낸다는 표현은 같았지만 실제 내용에서는 적극적으로 균형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자임한 현 정부의 방향이 이전 보수정권의 노선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전 정부에서 상정했던 한국의 외교적 위치를 부정한 대신 새롭게 살린 것은 과거 1·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문법이었다. 이 교수는 “‘남북관계 진전과 4강 외교의 균형발전’이라는 오래된 노선으로 회귀한다는 선언은 남북관계의 진전이 한국 외교의 자율성을 높여 준다는 경험에 근거한 발상”이라며 “문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으로 나타났지만 반향은 미미했고 북한의 반응도 냉랭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끈질긴 구애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화해국면이 이어지며 마침내 남북의 극적인 합의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이번 남북회담의 결과를 긍정적으로 보는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가 10년에 걸친 보수정부의 대북정책과는 단절하고 대화를 우선한 이전의 노선을 재확인한 것이 주효했다는 평가에 공감한다. 하지만 직전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10·4 남북공동선언이 나온 분위기와는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다. 당시 회담장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했으니 안건이 생기면 (또) 오시면 되지 않습니까”라며 ‘밀당’을 시전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차비는 뽑아가야지요”라는 답으로 응수한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임기말이어서 사실상 다음 회담을 기약할 수 없으니 어느 정도까지 합의를 만들 수 있을지 긴장감이 컸던 것도 사실이고, 또 막상 기싸움이 끝나고 나선 다시 회담시간을 연장해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도 했지만, 이번 회담처럼 화기애애하지는 않았다.” 노무현 정부 당시 통일부 고위관계자가 본 2007년과 올해의 남북회담 현장의 차이점이다. 그는 당시 통일정책의 기조가 현 정부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많은 부분이 그때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10·4 선언이 결국 선언 이상의 구체적 조치를 이어가지 못한 부분도 있는데, 그러한 학습효과가 있기 때문에 (2차 회담 이후) 이번 회담에선 최대한 불확실성을 줄이자는 쪽으로 상당히 사전준비에 공을 들인 것으로 안다”고 이 관계자는 말했다.

주변국과의 관계 조율은 현재진행형

가장 달라진 것은 회담 당사자인 남북 양측뿐만이 아니라 주변국의 상황이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상황에 맞춰 문재인 정부로서는 모든 판을 새롭게 상정하고 계획해야 했다. 이 과제는 현재진행형이다. 당장 ‘비핵화’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될 북·미 정상회담을 비롯해 남·북·미 3자 또는 중국까지 포함한 4자 협의과정까지, 현 정부로서는 계속되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해야만 한다.

현 정부가 한반도 문제 해결에 임기 초 2년이라는 시한을 설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과거보다 주도적인 입장에서 해결 당사자를 자임하더라도 북한을 둘러싼 주변국들의 대북정책을 일일이 조율하기엔 한계가 있고 시간과 노력도 필요한 것이다. 집권 후 2년 안에 기본적인 틀을 갖추면 이후 대북관계 역시 본궤도에 올라 관계개선에 속도를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예측가능하든 아니든 등장하게 될 여러 변수들이 앞으로의 전망을 불투명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보수진영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앞으로 마주하게 될 난관을 돌파할 수 있을지 쉽게 장담할 수 없다고 관측하는 목소리도 있다. 김태우 건양대 교수(군사학)는 바른사회시민회의가 개최한 ‘문재인 정부 1년 평가 토론회’에서 “4·27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은 남북관계 개선 등 일부 성과는 있지만, 대체로 북한의 입장을 많이 반영한 비대칭 협상”이라며 “특히 ‘북핵 폐기’라는 표현이 실종돼 향후 핵 해결 여부와 그 수준이 불투명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5월 3일 헌법기관장들과 오찬을 갖기 위해 청와대 인왕실로 이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문재인 대통령, 권순일 중앙선관위원장, 정세균 국회의장, 이낙연 국무총리. / 서성일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5월 3일 헌법기관장들과 오찬을 갖기 위해 청와대 인왕실로 이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문재인 대통령, 권순일 중앙선관위원장, 정세균 국회의장, 이낙연 국무총리. / 서성일 기자

이번 남북회담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에서도 향후 정세를 쉽게 전망할 수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럼에도 현재로선 가장 큰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 트럼프 정부의 국정운영 방향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해법이 나올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도 있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트럼프 미 대통령이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등 강경파를 기용한 것은 대북협상에서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는 한편, 비핵화 협상이 미흡할 경우에도 무마가 가능한 안전판 효과를 노린 것”이라면서도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을 위해서는 의제를 복잡하게 하지 않고 패키지로 나누어 일괄타결한 뒤 나머지 쟁점들은 별도의 회담을 통해 해결하는 식으로 접근하면 유리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북·미 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성공적으로 개최될 경우 먼저 북·미회담을 개최한 뒤 자연스럽게 문 대통령이 합석하여 3자 종전선언을 발표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조 위원의 분석이다.

비록 낙관적인 전망을 바탕으로 한 분석이지만 이대로 상황이 급진전될 경우 국내 정치상황 역시 요동칠 수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집권 후 처음으로 표심의 평가를 받는 6·13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여파는 적지 않다. 남북정상회담이 ‘위장평화쇼’라는 자유한국당의 공세가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오히려 역풍을 부르는 상황에서 현 정부와 여당의 지지율 고공행진이 당분간 굳히기 국면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가올 6·13 지방선거 승기 잡은 여당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행되는 여론조사에서 보수성향의 유권자들까지 남북 간 평화국면을 환영하고 있어 냉전시대의 대립구도를 바탕으로 한 보수정당의 정체성 위기는 더욱 심각한 내부 혼란을 부를 수 있다. 당장 자유한국당 안에서도 남북정상회담 결과와 평화국면 조성에 대해서는 비판을 줄이고 보다 정교한 대응방안을 고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자유한국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장차 시간을 두고 보면 (이번 회담이) 결국 ‘쇼’였다는 게 밝혀질 거라고 보기는 하지만 그런 얘기를 선거 앞두고 하는 건 또 다른 문제”라며 “문재인 정부 지지율이 높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심판론을 펴면 오히려 상대방 지지층을 결집시킬 수 있다는 게 걱정이고, 우리로서는 승산이 있는 지역 위주로 전략적 선택을 하는 게 그나마 무난한 대안”이라고 말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북·미회담이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파국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는 한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성과가 지방선거에 여당이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라는 전망은 공통적이다. 여당 역시 선거가 다가오면 보수층이 결집해 일부 격전지에선 판도가 바뀔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큰 변수가 없다면 전반적으로 해볼 만한 선거라는 판단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오히려 지방선거 이후를 고민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여당과 현 정부 중심으로 여론이 견고하게 기운 상태가 이어지면 보수야당 역시 내부 개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당의 한 재선의원은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보수야당 안에서 지도부 교체 정도를 넘어 예상치 못한 정도로 쇄신 움직임이 있을 수 있을 텐데,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다음 총선이 있을 2020년까지 원내에서 사사건건 정부·여당의 발목을 잡으면 문 대통령 임기 초보다 더 심한 정국 경색이 이어질 게 걱정”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보수진영에서는 대북관계가 개선되더라도 정치적 정체성을 바꾸는 대신 새롭게 시작될 남북협력사업의 지원규모와 내용을 빌미로 현 정부와 대치하는 전략을 채택할 가능성도 있다. 임기 첫 해 야당과의 협치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은 문재인 정부로서는 더욱 복잡해진 숙제를 떠안을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중국학)는 “단순히 분단을 관리하려는 식의 태도로는 영원히 분단의 감옥에서 나올 수 없고, 대립을 재생산하는 내부 요소들을 청산할 수 없기 때문에 남북관계를 다시 대립적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시도들이 계속될 것”이라며 “또 교류가 증가한다고 상호 이해와 신뢰가 증진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와 갈등요인이 등장해서 화해·협력에 장애를 조성할 수도 있으므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됐다”고 말했다.

결국 임기 2년차를 장식할 대내외 이슈들이 줄줄이 놓여 있는 문재인 정부로서는 다가오는 과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물론 이후 임기 후반을 대비해서라도 협치를 바탕으로 하는 정공법을 피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반대편에 있는 정치세력을 비롯해 남북관계 개선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않은 시민사회와의 소통도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 교수는 “아래로부터 형성된 힘의 뒷받침이 없이는 당국자 간의 합의가 언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시민의 역할을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