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당에 ‘미국’은 참 미묘한 존재다. 미국의 패권적 국제 지배와 특히 분단문제에 대한 책임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정치인에게 미국 제도권 정치와의 직접 교류는 미묘한 문제였다. 1997년 ‘국민승리 21’부터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 등을 거치면서 진보정당 대표가 미국 의회나 유엔본부를 방문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심지어 2004년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는 외교통일위원이었지만 미 의회를 방문하지 않았다.
![[원희복의 인물탐구]민중당 상임공동대표 김종훈 “진보당 해산 자료 숨기고 있다”](https://img.khan.co.kr/newsmaker/1271/1271_40.jpg)
보이지 않는 이런 ‘관례’가 깨졌다. 민중당 김종훈 상임공동대표(54·국회의원)가 최근(3월 19~22일) 미 의회를 방문한 것이다. 민중당은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을 잇고, 당 기본정책에도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청산하여 사회 전 분야에서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김 대표는 지난 미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툴시 개버드 하원의원, 드와이트 에반스 하원의원 등을 만나 한반도 평화에 대해 논의했다. 김 대표는 또 인권운동가 제시 젝슨 목사와 유엔 정무국 아·태국장을 만나 한국 진보민중단체의 평화 메시지도 전달했다.
진보정당 관례 깨고 미 의회 방문
-진보의식은 곧 ‘반미정서’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진보정당의 미국에 대한 입장은 미묘하다. 민중당도 대미 종속외교를 끝내야 한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당의 입장도 미국과 우리의 관계가 적대적이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속적인 관리대상이 아닌 상호 호혜적 평등관계로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를 한다. 특히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7500만 생명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남북한 의견을 존중하라는 요구였다.”
-미국은 과거 보수정당 국회의원도 반미 학생운동을 했으면 입국을 거부했다.(2001년 장영달 민주당 의원과 2001년 임종석 민주당 의원(현 청와대 비서실장)이 미국 입국을 거부당했고, 2013년 외통위원이던 정청래 의원도 입국이 거부돼 미국대사관 국감을 못했다)
“그런 얘기 전혀 없었다. (하~하~) 오히려 우리 동료의원들이 우스갯소리로 ‘비자 나왔냐’고 묻기도 했다.”
-이번에 만난 미 상·하원의원들은 5월 북·미회담을 어떻게 전망했나.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5월 북·미회담 모두 다 잘될 것이다. 이번에 가서 미국 상·하원의원을 만난 느낌은 기본적으로 한반도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두 가지 기류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이 너무 즉흥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북·미가 실제 평화·화해로 갈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래도 만남은 중요하다’면서 적극적인 지지를 요청했다.”
김 상임대표는 지난해 11월 8일 미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국회에서 연설할 때 의석에 앉아 ‘우리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원한다’는 영문 손 팻말을 들고 시위했다. 진보정당이 줄기차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한반도 평화다. 그는 “우리의 기본적 입장은 ‘대결이 아닌 대화’ ‘전쟁이 아닌 평화’다”라면서 “현재 불안정한 정전협정이 남북, 북·미 불가침협정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당의 기본입장을 설명했다.
사실 1989년 노태우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나 1994년 김영삼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그리고 2000년 김대중의 6·15선언이나 2007년 노무현의 10·4 정상회담 모두 ‘평화통일’이다. 역대정권 모두 남북이 서로의 존재(체제)를 인정하고 교류·협력을 통해 느슨한 연합·연방제를 거쳐 완전한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다. 무력·흡수통일을 공공연히 주장한 남재준 전 국정원장(그는 만주까지 수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은 명백한 헌법 위반이다. 그런데도 평화통일을 말하면 ‘종북’으로 몰렸다.
“우리의 일관된 입장은 ‘북한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대화의 상대’라는 것이다. 북한은 한반도에서 같이 살아야 하는 민족 구성원이다. 실제 진보정당은 내용적으로나 기본적으로 보수정당 김대중의 6·15나 노무현의 10·4선언을 넘어서는 내용을 천명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평화통일 의제가 사라지고, 체제유지를 위해 종북몰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거기에 우리가 희생당한 것이다.”

김종훈 민중당 상임대표가 3월 20일 미국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북·미 평화대화를 지지한다’는 손 팻말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민중당 제공
북한은 대화의 상대 ‘일관된 입장’
그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에 대해 “당헌·당규를 만들어 중앙선관위에 정당 등록을 하는데, 내용이 헌법적 가치를 넘어서면 선관위에서 등록을 받아주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청와대에서 뒤늦게 발견된 많은 문건 중에는 분명 통합진보당 해산과 관련된 자료가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는 “공문을 통해 자료요청을 했는데, ‘없다’고 하지 않고 ‘줄 수 없다’고 한다”면서 “문재인 정부도 속 시원히 진실을 밝히지 않고 여전히 진보정당을 ‘관리대상’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뒤늦게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사법부는 청와대 일개 비서관의 항의에 전전긍긍했으며,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은 청와대 요구대로 전원합의체에 넘겨준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김영한 전 민정수석 업무수첩에는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리기 이틀 전 청와대는 해산 결정을 미리 알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현재 진보정당은 원내 6석의 정의당과 1석의 민중당, 그리고 노동당 등이 있다. 그러나 지방의회(광역의원)는 민중당 소속이 3명이지만 정의당은 1명이다. 기초의원도 민중당 28명, 정의당 19명, 노동당 6명으로 풀뿌리에서는 민중당이 진보정당 수위다. 이번 6·13 지방선거에 임하는 당의 입장도 중요하다.
“우리당은 광역후보 7곳을 포함해 250여명의 후보를 낼 것이다. 득표율 3%, 100만표가 목표다. 울산이나 광주·전남·경기·부산 등 진보진영이 우세한 지역은 당선이라는 실제적 성과를 낼 것이다. 또 당의 인지도를 높여 민중당이 왜 만들어졌고, 어떤 정당인가를 이번 선거국면에서 알리려 한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과 연대해 울산 지역구 2석을 얻었다. 하지만 민주당이 여당이 된 이상 연대는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정당 단일화 작업은 잘 이뤄지고 있나.
“지역별로 연대전략이 진행되고 있다. 울산은 민중당과 정의당, 노동당 등과 기본적 합의를 이뤄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민주당이 여당이 된 조건에서 여러 고민이 있다. 민주당 지지율이 높지만 구체적으로 후보의 인지도가 낮기 때문에 민주당도 영남권에서는 여전히 야당적 입장이다. 따라서 민주당도 영남권에서는 독자적으로 돌파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을 것이다. 각 당의 내부경선이 끝나면 연대전략이 다양하게 고민될 것이다.”
-지방선거 기초의원 3~4인 선거구가 대폭 축소됐다. 이는 군소·진보정당으로는 매우 심각한 문제 아닌가.
“심각하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 얘기하는 지방분권·지방자치 강화라는 측면에서도, 촛불정신에 기초해서도 후퇴이고 개악이며 야합이다. 마지막에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밀실에서 논의했고 군소정당과 시민단체 등은 어떤 정보도 받지 못했다.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보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개헌에 민주당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정의당이 보수당인 민주평화당과 ‘평화와 정의의 의원모임’을 결성했다. 정의당은 연대 이전에 민주노총이나 한국진보연대 등 소위 민중단체들과 사전 논의나 입장 발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정의당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진보정치를 주창한다면 시민사회 세력과 사전 토론하고 고민하는 문제의식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진보를 바라는 많은 국민에게 이것이 어떤 식으로 비쳐질까. 그런 우려는 진보진영 전체의 문제다.”
-과거 민주노동당부터 통합진보당까지 비록 중간에 깨지고 또 깨졌지만, 진보의 집권을 위해 대통합을 추진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요즘에는 진보세력의 ‘연방제형 연합당’ 아이디어도 나온다.
“맞다. 우리가 자족·자위하는 정치세력에서 벗어나려면 진보세력 모두 힘을 모아도 어렵다. 통합의 기초를 만드는 것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형식과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 아픔과 간극이 있지만 누구를 위해 정치를 할 것인가라는 대의에 따라야 한다. 정당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민중을 위해 정치를 해야 한다. 진보진영이 단결하고 하나로 나가야 한다.”
지난해 10월 15일 창당된 민중당은 과거 민중연합당과 새민중정당 추진세력이 연합해 김종훈·김창한 상임공동대표 체제로 유지되고 있다. 과거 통합진보당 인사와 새로운 노동·농민·청년·자영업자 등의 새민중정당 세력이 모인 형태다. 공식 합당은 지방선거 이후로 미뤄놓고 있지만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이 4만명이다. 정의당이 보수당인 민주평화당과 연합한 이상, 민중당이 명실상부한 ‘수석 진보정당’이다.

김종훈 민중당 상임대표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1987년 군 제대 후 노동운동 투신
김 상임대표는 과거 통합진보당과의 관계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정당을 만든다는 것이 기본방침”이라며 “그렇지만 민주노동당에서 출발해 통합진보당 해산까지 함께 한 역사성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민주노동당이 정규직 노동자 중심이라면 지금 민중당은 비정규직 노동자·농민·빈민이 당원의 70%를 차지하는 것이 달라진 점이라고 설명했다. 김 상임대표는 “당원의 70%가 처음 정당에 가입한 비정규직 노동자와 청년들”이라며 “이들은 마지막까지 당원이 될 각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상임대표는 1964년 경북 경주에서 10남매의 아홉째로 태어났다. 경주에서 초·중·고를 나와 1983년 울산대(국문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등록금이 없어 ‘노가다’를 하며 대학을 다녔다. 탈춤반 회장 시절 광주학살 진상을 알았다. 그는 “광주의 진상을 알고 너무 가슴이 아파 잠을 못잘 정도였다”면서 “1984년 울산대 학원 민주화추진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했다”고 말했다. 1987년 군대에서 제대한 후 7~8월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투쟁에 함께 하면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그때부터 노동자들과 함께 살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 약속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97년 국민승리 21 울산동구 연락책으로 정당활동을 시작해 2002년 울산 동구 시의원(민주노동당), 2011년 울산 동구청장(통합진보당)에 당선된 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울산동구에서 노동자 대표로 당선돼 국회에 입성했다.
이 땅에서 진보정당 활동은 당 대표가 사형을 당하는 등 아픔이 많았고, 최근에도 당이 해산되는 등 고난의 연속이다. 정부·여당의 행태도 안타깝지만 더 아픈 것은 언론의 인식이다. 그는 “언론에서 통합진보당 해산과정에 ‘왜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가’를 정확히 다뤄주지 않았다”면서 “이명박·박근혜가 만든 우리에 대한 종북적 시각을 좀 거둬달라”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은 언론에 대한 하소연이 아닌, 처절한 절규로 들렸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