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4~5번의 큰 전환점에서 쌓인 갖가지 폐습 청산해야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당하기 직전이던 2017년 3월 8일,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라는 책을 펴냈다. 여기서 손 교수는 “박정희 신화도, 87년 헌정체제도, 97년 신자유주의 체제도 모두 넘어서 ‘새로운 공화국’, 새로운 체제로 나가야 한다”고 썼다.
지식인이 정권교체 이상으로 ‘새로운 체제’를 언급한 것은 이명박 정권이 한창이던 2011년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2013년 체제’를 말한 이후 6년 만의 일이었다.

2017년 10월 28일, 촛불시민혁명 1년을 기념하는 촛불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적폐청산 사회대개혁’이라고 적힌 종이컵을 들고 있다. / 이준헌 기자
2011년 당시 백 교수는 이명박 정권에 대해 “국민들은 솔직히 지칠대로 지쳤다. 지금보다 조금만 나아져도 살 만하겠다는 심경이 적잖이 퍼져 있다”고 진단했다. 2012년에 총선과 대선이라는 큰 선거의 기회를 맞아 정권교체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라는 ‘잃어버린 5년’간의 구태를 청산하자는 취지였다.
2012년은 선거라는 정해진 정치일정에 따라 시민들이 움직인 한 해였다. 반면, 2016년 11월부터 시작된 촛불혁명은 주요 정치일정인 총선이 이미 끝난 이후 시작됐다. 2017년은 이름 없는 시민들이 정해진 정치일정을 바꾸고 문을 연 한 해였던 것이다. 시민들의 사회참여가 정권교체로까지 이어진 만큼 ‘새로운 체제’에 대한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현재로서는 ‘적폐청산’이라는 단어가 구체제 타파를 상징하는 말이 됐다.
새로운 공화국이 타파해야 할 구체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양하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한국 사회가 4~5번의 큰 전환점을 겪는 과정에서 갖가지 폐습이 쌓여 왔다는 데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학자들의 합의가 세워져 있다. 1948년 이승만 정부 수립은 냉전 반공체제의 시작이었다. 고영주 전 KBS 이사장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한다”고 말한 것은 냉전 반공체제의 잔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으로 시작된 1961년 체제는 권위주의 정치문화와 국가주도형 산업화로 상징된다. 1987년 6월항쟁은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이끌어냈지만, 권위주의 정치를 완전히 끝내지 못했다는 한계를 보였다.
경제민주화와 적폐청산 맞닿아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37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한 민주정부 이후 권위적 정치문화는 더욱 약화됐다. 또한 1997년 체제는 경제를 시장에 맡기는 신자유주의 모델의 출발선으로 평가되고 있다.
촛불혁명은 위에 언급된 여러 사회적인 모순을 한꺼번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삼성 등 재벌과 박근혜 정부가 유착관계를 갖고, 청와대가 검찰과 국정원을 정권 유지 목적으로 활용한 것 등은 박정희 시절 권위주의 정치의 산물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으로 반대자들을 억압하고, 직접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 비선실세의 꼭두각시처럼 행동한 것은 1987년 수립된 대의민주주의의 허점을 노출시켰다.
손 교수가 평가하기에 여러 가지 사회 모순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모순은 1997년 체제의 모순이다. 신자유주의와 사회 양극화로 인한 대중들의 불만이 ‘헬조선’과 같은 유행어를 만들었고, 촛불혁명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정권교체 이상의 체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손 교수의 진단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대선후보 시절인 2017년 1월 기자간담회에서 “양극화 문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참여정부가 성공적으로 대응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2017년 12월 4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손호철 교수는 “민생이 최고의 적폐청산”이라며 “1997년 대선에선 가난할수록 김대중을 찍었지만, 2007년엔 가난할수록 이명박을 찍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사실 손 교수의 진단이 완전히 새롭다고 보긴 어렵다. ‘2013년 체제’ 논의가 한창이던 2012년 대선국면에서 큰 호응을 얻은 ‘경제민주화’와 “민생이 최고의 적폐청산”이라는 말은 맥락이 닿는다. 과거 경제민주화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가 적폐청산에 대한 지지로 옮겨갔다는 해석도 있다.
이미 시민사회에서는 정부가 경제민주화와 관련해서 어떤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한 바 있다. 2017년 7월 참여연대는 <새로고침 대한민국>이라는 책을 펴냈다. 참여연대 등 여러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집필한 이 책에는 국민발안제, 주민참여제도 등 70가지 제도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책의 2부에서는 민생문제와 관련한 여러 가지 개혁정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책은 평범한 시민들의 주거권 보장을 위해 공공임대주택을 15%까지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에 따르면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전체 인구 중 자가주택을 소유한 비율은 56.8%에 그쳤다. 자가주택이 없는 시민들은 전세와 월세로 살 수밖에 없다. 전세가와 월세가 매년 치솟으면서 계약기간이 끝날 때마다 집을 옮겨다녀야 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공공임대주택 확대라는 것이 시민사회의 진단이다.
OECD 최장 노동시간이라는 오래된 오명을 벗기 위한 정책 대안도 이미 나와 있다. 책은 모든 시민들이 주당 52시간 이상은 일하지 못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현재 행정해석을 통해 주당 실질 노동시간이 68시간까지 가능한 것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초과 연장노동이 허용되는 특례업종에 대해서도 제한적으로 일부 업종에 대해서만 허용하는 방식으로 고쳐야 한다는 게 시민사회의 진단이다.
시민사회가 제안한 안들은 수년 전부터 거론되던 안들이다. 일부는 정부와 국회에서 수용하기도 한다. 이미 국회에서는 주간 근무시간을 최대 52시간으로 명시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에 여야가 합의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도 2017년 12월 22일 대기업 회장단을 만난 자리에서 임금상승과 노동시간 단축 등을 강조했다.
‘새로운 체제’의 완성은 개헌
시민사회의 개혁안들은 결국 정치권에서 제도화해야 한다. 시민들의 의사가 정치권에 정확히 반영될 수 있도록 정치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강상호 국민대 정치대학원 겸임교수는 현행 헌법에서도 지금보다 나은 정치제도를 구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개헌이 되지 않더라도 선거법만 고친다면 투표와 당선자 숫자의 비례성을 강화시킬 수 있다. 또한 정당법을 고쳐서 다양한 정당이 시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정치구조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2017년 1년간 개헌특위 자문위원으로 활동한 강 교수는 결국 ‘새로운 체제’의 완성은 개헌이 될 것이라며 “시대적 요구에 따라 지난 수십 년간 정치제도나 인권 관련한 여러 가지 법률들이 바뀌어 왔다. 개헌은 변화된 법률과 헌법이 맞아떨어지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1년간 개헌특위 자문위를 하면서 과연 2018년 지방선거 때 헌법이 바뀔 수 있을지 의문을 갖게 됐다. 하지만 개헌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여러 전문가들이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점에 대해서 토론하게 됐다. 전문가들이 했던 논의가 언젠가는 우리 사회에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