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위원회의 ‘문예위 논평’ 철회, 총선 공약과 어긋나고 지도부의 역할 안 보여
2005년 12월 6일 서울 문래동 민주노동당 중앙당사 사무실은 마비됐다. 이날 오후 1시 노현기 당시 민주노동당 부평구위원회 부위 원장이 <매일노동뉴스>에 기고한 칼럼 ‘황우석 신드롬 이면의 파시즘’이 인터넷에 공개됐 다. 노 부위원장은 “‘황우석 신화’ 이면에 일체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것, 그것은 파시즘”이라고 적었다. “‘국익을 위해서 교수님의 연구가 중단돼서는 안 된다’며 딸의 손까지 부여잡고 난자 기증 행렬에 나타난 어미의 무지를 뭐라고 탓해야 할지 난감하다. 조선의 소녀들에게 ‘군대 성노예’로 나갈 것을 선동했던 노천명과 딸의 손을 잡고 나온 어미가 동일인으로 느껴진다”는 구절이 있었다. 난자 기증자를 일본군 위안부에 비유했다는 분노를 담은 목소리가 당 안팎에서 쏟아졌다.
권영길 임시 당대표는 12월 9일 “당직을 맡고 있는 일부 당원들이 적절하지 못한 비유와 방식을 통해 개인 의견을 밝히고 그것이 당의 안팎에서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며 해당 사안에 대한 ‘함구령’을 주문했다. 칼럼이 나가기 전부터 현역 국회 의원들을 통해 황우석 박사의 연구비 자료를 요청하는 등 생명윤리 문제를 파고들던 한재 각 연구원(현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의 활동에도 제동을 걸었다. 권 대표는 훗날 당시의 방침에 대해 당원들에게 사과했다. 노회찬 의원은 2007년 9월 4일 대선후보 경쟁을 벌이던 권 대표를 겨냥해 “진보정당 대표답지 않은 행보”였다며 “(중요한 것은)일시적 평판에 굴하지 않고 진실의 편에서 진보정당의 노선을 지키는 것, 결국 문제는 철학과 일관성” 이라고 말했다.(<레디앙> 2007년 9월 4일)
문예위 “성우 목소리 교체 비판” 논평
일관성 있는 진보정당의 노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까? 2016년 7월 28일 정의당 상무위원회는 당 산하 부문위원회인 문화예술 위원회(문예위)가 7월 20일 낸 논평을 철회 하기로 결정했다. 논평의 제목은 ‘정치적 의견이 직업 활동을 가로막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게임업체 넥슨이 메갈리아에서 제작한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SNS에 올린 성우의 목소리를 교체한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당 상무위는 김자연 성우가 넥슨과 원만 하게 합의했고 당사자의 입장은 존중돼야 하며, 논평의 취지인 ‘부당한 노동권 침해’와 달리 정의당이 ‘친메갈리아’냐는 논쟁만 일으켰고, 논평 발표 시 최고 책임자에게 보고 없이 사무부총장 선에서 결정됐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황우석 사건과 마찬가지로 ‘당 안팎에 논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정의당 문예위가 논평을 낸 것은 총선 공약 이행과 관련이 있었다. 문예위는 지난해 8월 문화예술분야 종사자의 권익 개선을 위해 당원 100여명으로 결성됐다. 미술사 연구자 권혁빈씨가 위원장, 게임업계 종사자 유성민씨가 부위원장이 됐다. 지난 총선 게임산업 종사자들에 대한 근로감독을 강화하고 개발사와 유통사에 수익분배 구조를 개선한다는 내용의 공약을 발표했다. 게임산업 종사자들의 노동환경이 정치권에서 공론화된 것은 처음이었다. 7월 21일 게임산업 노동실태 관련 토론회 자료집을 작성해 이정미 의원실에 제출 했다. 문예위는 김자연 성우의 문제도 게임산업 종사자의 노동권에 관한 이슈로 봤다. 권혁빈 위원장은 “메갈리아에 대한 찬반 논란을 떠나서,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 때문에 노동에서 배제되는 것은 원칙적으로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논평을 냈다”고 말했다. 권 위원장은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당은 문예위 위원들에 대한 당내 출당처분 요구는 기각했지만, 문예위를 사고위원회로 처리할 방침이다.
당 상무위의 결정은 즉각적으로 터져나오는 당내 여론에 부합한다. 당원들의 반발은 강력했다. 문예위의 논평이 발표되지 당원 게시판은 문예위의 결정을 비판하는 내용이 줄을 이었다. 문예위 위원들이 ‘메갈리아를 옹호한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한 당원은 “메갈리아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IS와 마찬가지인 극단주의자 파시즘이다. 우리 정당이 파시즘을 옹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중장년층 당원 상당수는 메갈리아에 대해 모르고 있다가 이번 사건을 통해 알게 됐다. 한국 남성들을 향한 원색적이고 거친 욕설을 접하고 기겁했다. “메갈리아가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흙수저 청년들을 비난한다”는 내용의 당 게시글이 이들 상당수에게 지지를 얻었다. 그렇다면 상무위의 결정은 일시적 수습책이 아니라 당원 민주주의일까.
상무위의 결정은 당이 ‘대중적 진보정당’을 표방하며 그동안 주장했던 바와 배치된다. 김자연 성우의 목소리 교체는 넥슨과 성 우 간의 원만한 합의로 이뤄졌다는 입장은 당장 노동계의 현안인 특수고용직 문제와 배치된다. 특수고용직은 근로자처럼 일하면서도 계약 형식은 사업주와 개인 간의 도급계약 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화물기사, 택배기사, 골프장 캐디 등이 해당된다. 정의당은 특수고용직 등 주 15시간 미만 일하는 초단시간 근로자들도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상무위 입장에 따르면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이 고용보험에 가입 하지 못하는 직종임을 알면서 해당 일을 선택한 것 역시 ‘자발적 선택’이자 ‘원만한 계약’으로 볼 수 있다. 사상의 자유를 옹호해온 역사와도 어긋난다. 정의당은 2014년 12월 헌법 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렸을 때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세웠다. 정의당은 헌재 결정에 대해 “정당의 노선과 활동에 대해서는 찬성과 반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명백한 실체적 위협이 없는 한 이것이 해산의 법리적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성 평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김세균 공동대표는 당원들에 대한 공지에 “편 가르기 식으로 치달은 논쟁의 열기를 조금이라도 식히는 휴지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취지였다”며 향후 수습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마련하겠다고 밝 혔다. 당내 여성주의 위축을 걱정하는 당원 모임이 연명한 성명에서는 “게시판에는 욕설을 비롯한 언어폭력이 난무하고, 절차에 맞지 않는 출당조치까지 들먹여지고 있다. 여성당원들은 본인은 먼저 메갈리안이 아님을 고백 하고 나서야 의심 받지 않고 말할 수 있거나, 개인으로서 던지는 발언 하나 하나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 상무위 결정 이후 페이스북에서 문예위 논평에 찬성 입장을 밝힌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던 당원들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메갈을 지지 하느냐”는 공격에 시달린다고 전했다. 다양한 의견개진이 어려웠던 상황이 더 악화됐다.
당원들 강력 반발에 상무위 서둘러 봉합
정의당의 근본적 문제와 지도부의 무책임이 거론된다. 당직 경험이 있는 한 40대 당원은 “‘대중성’에만 천착해 이념 없는 정당이 된 정의당의 한계다. 정의당은 통합진보당의 북한 추종 노선에 반대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상당 부분 다른 이념적 색깔을 가진 사람 들이 결합했고, 이럴수록 당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지도부의 역할이 중요한데, 의원들은 재선에 도움되지 않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묻혀 있는 진보적 이슈를 발굴하기 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는 이슈에 편승해 표를 끌어모으는 ‘업자 마인드’가 됐다”고 말했다. 논쟁이 진행되던 주중 또 다른 당원은 “심상정 대표는 숨어 있고, 노회찬 의원은 ‘오유(커뮤니티 사이트 ‘오늘의 유머’) 여론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심상정 상임대표는 7월 29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당의 하부 단위에서 부적절한 논평이 나갔다”고 재확인했다. 심 대표는 “정당은 문제제기 집단이 아니라 문제해결 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극단적 방법을 제어해 나가는 것이 책임 있는 정당의 모습” 이라고 밝혔다. 논평을 메갈리아 옹호의 문제로 보면서 양심의 자유 및 노동 문제가 다시 한 번 증발했다. 심 대표는 “정의당은 더 이상 실패할 수 없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분당과 합당, 탈당 등으로 얼룩진 진보정당 역사를 의식한 말이었다. 당내에서는 이것이 상무위 결정의 가장 핵심적인 이유로 꼽힌다. 그러나 지도부의 결론은 당을 더 분열시키고 있다. 당에서는 문예위 논평에 반발 하는 이들의 탈당과 상무위 결정에 반발하는 이들의 탈당이 이어졌다. 총선 공약 이행에도 차질이 생겼다. 당장 8월 초 열리기로 한 이정미 의원실 주관의 게임산업 노동실태 토론회가 취소됐다. 문예위가 하반기 준비하고 있는 공공미술관 민영화와 문화예술기금 고갈 문제에 대한 활동도 정지될 가능성이 크다. ‘철학과 일관성’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