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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 ‘좌클릭’ 부자감세부터 삐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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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검토 몇시간 만에 철회 해프닝… 보수정당 경제철학 다시 도마에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는 지금의 여권 내부에서도 강경파로 꼽힌다. 지난 대선 직후 ‘좌파 적출론’을 내세우면서 지난 정부 사람들을 색깔론으로 몰아세웠던 당사자인 안 대표는 4대강, 미디어법, 세종시 논란 등 굵직한 현안이 불거질 때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돌격대장’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그런 안상수 대표가 느닷없이 좌향좌를 선언했다. 안 대표는 10월 26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개혁적 중도보수 노선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한나라당의 미래 청사진을 만들고 있다. 당의 강령을 중도 개혁의 가치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개정하겠다”고 말했다. ‘70% 복지의 시대’를 내걸고 있는 안 대표는 이를 정책적 수준으로 구체화시킨 결과물을 내년 봄에 내놓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10월 26일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10월 26일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음 총선·대선 겨냥한 ‘중도보수’ 선언?
안상수 대표의 이런 변화는 한나라당의 다음 총선·대선전략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지난 대선에서 중도 실용주의를 내세워 중도층의 표심을 공략한 이명박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중원 진출의 교두보를 미리 마련하겠다는 정치적 계산이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한나라당이 6·2 지방선거 참패의 원인을 분석해 내놓은 백서 <새 출발을 위한 솔직한 고백-2010 지방선거에서의 패배와 반성의 기록>은 “호전되는 거시경제 지표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한나라당에 대한) 반발표로 이어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안 대표의 ‘중도보수’ 선언은 이대로라면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왼쪽을 향하는 안 대표의 발걸음이 그리 가볍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10월 27일 한나라당 지도부가 정두언 최고위원의 부자감세 철회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다가 불과 한 나절 만에 이를 번복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 국회는 지난해 세법개정안 심사를 통해 소득세와 법인세율의 최고구간에 대해 2년 간 세율인하를 유예했다. 이에 따라 2012년부터 법인세 2억원 초과구간 최고 세율은 현행 22%에서 20%로, 소득세 8800만원 초과구간 세율은 현행 35%에서 33%로 각 2%포인트가 하향 조정될 예정이다.

정 최고위원은 이같은 감세기조를 백지에서 재검토해 오는 2012년 이후에도 동일한 소득세와 법인세를 부과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2014년까지 모두 7조4000억원의 재정 여유분을 확보하고, 이 예산을 서민복지 사업에 활용하자는 것이다. 그는 “야당은 여전히 ‘부자감세’ 프레임으로 여당을 공격하고 있다. 차기 총선· 대선에서 야당 공격의 빌미를 차단하려면 감세 철회가 중요하다”고 했다. 역시 선거전략적 측면을 앞세운 논리이지만, 그의 ‘감세 철회’ 제안은 필연적으로 보수정당의 이념적·조직적·정책적 뿌리에 대한 근본적인 재성찰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이에 대한 한나라당의 첫 반응도 긍정적인 편이었다. 한나라당 배은희 대변인은 “당에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정책위에서 부자감세 철회에 대해서 검토하기로 했다”고 밝혔고, 정치권과 언론은 이를 사실상 한나라당의 감세기조 철회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한 석간신문은 “안상수 대표가 오는 28일 부자감세 철회를 공식 발표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 시간이 지난 뒤 한나라당은 기존의 입장을 번복했다.

10월 26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강만수위원장(왼쪽), 백용호 정책실장과 함께 회의실로 가고 있다. |연합뉴스

10월 26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강만수위원장(왼쪽), 백용호 정책실장과 함께 회의실로 가고 있다. |연합뉴스

다시 국회 기자실을 찾은 배은희 대변인은 “안 대표의 공식 발표가 예정돼 있다는 보도는 오보”라며 “단순한 검토일 뿐이지 감세 철회안을 당 지도부가 확정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앞선 자신의 브리핑에 대해선 “실수였다”고 해명하면서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다음 선거를 의식해 ‘중도보수’ 노선을 야심차게 천명한 안상수 대표로서는 그 시작부터 체면을 구긴 셈이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악어 눈물 흘리기 흉내를 내고 있다”고 혹평했다.

한나라당 감세 포기는 ‘강만수의 힘’
안상수 대표는 다음 날 “단순한 검토 지시가 마치 수용하는 것처럼 비쳐 개탄스럽다”면서 “당직자들은 주요 정책에 대해 발언하거나 언론과 소통할 때 참으로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당 대변인의 브리핑 과정에서 오해와 혼선이 발생했다는 질타였다.

그렇다면 이날의 논란은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을까. 한나라당의 번복 브리핑이 나오기까지 몇 시간의 상황을 정리해 보면 석연치 않은 대목이 적지 않다. 우선 주목해야 할 대목은 청와대와 정부의 반대론이다. “정책 일관성 측면에서 예정대로 2012년부터 최고세율을 인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에는 변함이 없다.” 기획재정부 주영섭 세제실장의 반응이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감세기조의 철회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며 선을 그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두언 최고위원의 감세 철회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던 한나라당이 청심(靑心)의 반대 속에서 이를 포기한 게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한 정황이다. 결정적인 것은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MB노믹스의 주창자이기도 한 강만수 대통령 경제특보의 힘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표적인 감세론자인 강 특보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한나라당 측에 전화를 걸었다”고 밝혔다. 여당을 대상으로 한 ‘교통 정리’에 직접 나섰음을 시사한 발언이다. 그는 “정치인 개인의 소신도 중요하지만 내용을 알고 고집하는 소신인지, 모르고 하는 건지…”라며 정두언 최고위원을 겨냥했다. 이어 강 특보는 “MB노믹스는 청와대가 바꾸어야 바뀌는 것이지 당이나 한 사람의 정치인이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인 ‘강만수의 힘’이 다시 한 번 확인된 순간이었다. 당 내의 분위기도 그리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고흥길 정책위의장은 “감세 철회를 적극 검토해 반영한다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했다. 세법 개정안을 직접 다루게 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 강길부 위원장도 “감세 철회는 한두 사람이 주장한다고 결론을 낼 사안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부자감세 철회’ 논란은 이렇게 안상수 대표에게 적지 않은 상처만을 남긴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언제든 다시 불거질 문제라는 전망이 많다. 최근 ‘복지국가론’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는 침묵모드를 이어가고 있지만, 경제정책과 관련해 박 전 대표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한구 의원은 “법인세는 예정대로 감세로 가고, 소득세는 감세를 철회할 필요가 있다”며 일종의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거침없는 보수표심 다잡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김문수 경기도지사. ‘서민경제, 민생’을 강조하고 있는 이재오 특임장관이나 오세훈 서울시장 등 잠재적 대선후보 그룹도 대선 행보의 본격화와 맞물려 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감세’로 대표되는 보수정당의 경제철학, 머지않은 시점에 다시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송호균 <프레시안 기자> ukno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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