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정치역정은 영욕과 부침, 좌절과 영광의 연속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열기가 뜨겁다. 사진은 국회 빈소의 조문 모습. <박민규 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이 8월18일 영면에 들어갔다.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빼닮았다. 영광보다는 좌절,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늘 희망을 지향했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결코 꺾이거나 멈추지 않았다. 그의 삶 가운데 절반 넘은 기간을 차지하는 정치 역정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다. 그는 늘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민주주의는 시대정신이자 민중의 바람이었지만 목숨을 건 정치인은 드물다. 그에게 민주주의는 평화와 인권, 평화 통일을 위한 대전제였다. 민주화를 위해 그는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 5년 반 동안의 투옥과 3년여의 망명, 6년 반의 가택연금이라는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항일운동 보며 민주주의 신념 싹터
한반도 평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한국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실현과 남북화해·협력으로 빛을 발했다. 남북관계를 대결의 시대에서 대화 시대로 진입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인적으로 한국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 등의 영예를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북한 김정일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71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악수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경향신문 자료사진>
1924년 1월6일(음력 1923년 12월1일) 하의도(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 어머니 장수금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외딴 섬 하의도에는 동학운동과 항일 민중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어린 시절 항일 농민운동에서 싹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의도에서 소년 김대중은 서당을 다니며 <천자문>과 <동문선습>을 배웠다. 1934년 4년제 아래의공립보통학교(현 하의초등학교)가 생기자 동생과 함께 입학했다. 그는 ‘옥중서신’에서 “섬마을 일가 친척으로부터 ‘대중 아제(아저씨), 공부 잘하요?’라는 말을 듣기 좋아했다”고 술회했다. 아들의 재능을 눈여겨 본 그의 부모는 목포로 이사했다. 김 전 대통령은 목포 제일보통학교로 전학했다. 목포제일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는 웅변, 연설, 글쓰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김대중 학생은 민족의식이 뚜렷했다. 반일 감정을 드러낸 작문을 하는 바람에 반장 자리를 내놓은 일도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언젠가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오셨다. 아버지는 일본말을 못하셨다. 학교에서는 모든 학생의 한국어 사용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자간에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쳐다보다가 헤어졌다. 그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목포상선회사에 취직했다. 대학에 진학하면 일제의 징집 영장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에 들어간 것이다. 일본인 회사에 근무하면 징집 영장이 나오지 않았다.
죽음 문턱까지 간 ‘김대중 납치사건’
8·15광복은 정치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그는 1945년 목포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이듬해 백남운이 주도하는 좌익계 정당인 신민당에 입당했다. 이 경력은 ‘김대중 색깔론’의 소재로 두고두고 악용됐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인민군에 의해 죽을 고비를 맞은 적이 있다. 사연은 이렇다. 사업차 서울로 출장간 사이에 6·25를 맞은 김대중은 400km를 걸어 20일 만에 목포에 도착했다. 그를 기다린 것은 ‘반동분자’라는 인민군의 낙인이었다. 그는 곧 목포 감옥에 수감됐고 인민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다. 함께 수감돼 있던 80여 명 가운데 20여 명은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기지를 발휘해 수감자들과 함께 극적으로 감옥문을 깨고 탈출했다. 그도 그 중 하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7년 16년만에 찾은 광주 망월동 묘지(현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가 사업을 한 것은 8·15광복과 함께 국가 귀속재산이 된 목포상선의 관리인으로 선정되면서다. 성실성과 일처리 능력의 대가였다. 6년 뒤인 1951년 3월엔 ‘흥국해운’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1948년부터는 목포일보 사장 자리에 앉기도 했다. 이렇듯 김 전대통령은 사업에도 수완을 보였으나 그의 50년 삶을 맡긴 정치와 인연을 맺으면서 사업에서 손을 떼게 된다. 그의 정치 역정은 수난과 영광의 연속이었다. 그가 정치에 입문한 계기는 1952년 이승만 정권의 발췌개헌에 의해 야기된 정치파동이었다. 그는 “나는 정치에 비상한 관심이 있었고 나름대로 소질이 있다고 하던 차에 이 사건이 터졌고 나는 감연히 정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고 회고한다. 1954년 목포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전남대 학장 출신인 정중섭 후보에게 완패했다. 1958년에는 4대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강원도 인제 선거구였으나 유세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의 방해공작으로 선거 등록 무효가 된 것이다. 소송을 통해 대법원 선거무효 판결을 받아 1959년 인제 보궐선거에 재도전했으나 또 분루를 삼켜야 했다. 그해 그는 첫 부인을 잃는 아픔을 함께 겪어야 했다.

서울 YMCA 건물에 매달린 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강연을 듣고 있는 학생들.
19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서도 패했고, 4·19 혁명으로 다시 치러진 1961년 5월 인제 보선에서 처음으로 화환을 목에 걸었다. 기쁨도 잠깐이었다. 당선 사흘만에 5·16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과의 악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군정 기간에 세 차례나 투옥됐다. 평생 반려자이자 동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난 것이 이 무렵이다. 그에게 이 여사를 소개한 것은 가톨릭 대부 장면 박사다.
5·16 쿠데타는 정계 입문 10년만에 정치인 김대중을 정치적 고향인 목포로 향하도록 했다.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에 출마한 그는 압도적 표차로 국회에 입성한다. 의정 활동은 빛났다. 본회의 최다 발언(개원 후 6개월 13회)과 최장 시간(5시간19분) 발언기록을 세웠다. 1967년 6월 7대 국회의원 선거는 김대중을 ‘호남의 지도자’로 만든 일대의 사건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혁명 동지’ 김병삼 후보(5·16 당시 헌병사령관)를 지원했다. 국무회의를 목포에서 여는 파격을 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목포 시민들은 김대중을 선택됐다.
1968년 평생 동지이자 숙적이 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났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해 6월 신민당 원내총무로 임명돼 3선개헌 반대운동을 주도하는 등 ‘40대기수론’을 선도하고 있었다. 1971년 김영삼 전 대통령과 ‘운명적 결투’를 치렀다. 신민당 대선 후보 지명전이었다. 2차 투표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김영삼 전 대통령을 물리쳤다. 그를 전국구 정치인으로 강력하게 다시 부각시킨 ‘사건’은 박 전 대통령과 대결한 1971년 대선이었다.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 땐 100만명이 넘는 청중이 운집해 ‘김대중 대통령’을 외쳤다. 군사정권의 장기집권 음모에 대한 일종의 시민 저항이었다. 그러나 선거에선 95만표 차이로 석패했다. “김대중은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나돌았다.
4수 끝에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
이 덕분에 대선 직후에 있었던 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신민당 돌풍이 불었다. 간담이 서늘해진 박정희 정권은 본격적으로 야당과 김대중을 탄압했다. 8대 국회의원 선거 이틀 전에 목포에서 광주로 가는 국도에서 8톤 트럭이 김대중 후보 차를 덮치는 사고가 났다. 무고한 시민 3명이 즉사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큰 부상만 입은 채 살았다. 두 번째 죽음의 위기였다. 아직도 그 트럭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그 사고에 대해 “당시 차량이 비스듬히 충돌했기 망정이지 조금만 더 정면 쪽으로 부딪쳤다면 그때 죽었을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결과를 발표한 뒤 송별오찬에서 환담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2년 10월17일 ‘10월 유신’이 발표됐다. 신병 치료차 일본 도쿄에 체류하던 김 전 대통령은 유신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1973년 8월8일 밤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돼 수장당할 뻔했으나 미국과 일본의 개입으로 목숨을 구했다. 이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 역시 아직도 소상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는 1976년 3월 함석헌·문익환 등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출옥 뒤에도 연금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돼 있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민주화의 봄’을 맞았고, 1980년 3월1일 정치 복권이 이뤄졌다. 그러나 두 달 뒤 다시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계엄포고 10호를 발동했다. 포고문은 전·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 정치활동 중지 등을 담고 있었다. 신군부는 부정부패 및 소요 조종 혐의로 김 전 대통령에게 족쇄를 채웠다. 그리고 9월 그를 내란음모죄로 몰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케 한다. 국내외 석방여론 압력이 커지자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더니 다시 20년으로 형량을 낮췄고, 결국 2년7개월만에 석방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월세 900달러짜리 아파트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 본의 아닌 망명생활은 2년2개월 동안 계속됐다.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고국의 민주화 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1983년 6월 그는 뉴욕타임스에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단식 지지 및 투쟁의 의의를 설명하는 기고문을 냈다. 그리고 국내에 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다.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 신민당의 압승을 이끌어냈다. 그의 계속된 민주화 투쟁은 1987년 6월 항쟁의 원인이 됐다. 전두환 정권의 항복선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6·29선언을 낳은 것이다. 당시 민정당 노태우 대표는 직선제 개헌과 소선거구제를 수용했다.

1988년 4월 평민당 서울 단합대회에서 연설하는 당시 김대중 총재.
1987년 7월 정부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 5·18 관련자 등 시국사범 2335명을 사면복권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해 9월8일 광주 망월동(현 국립5·18 민주 묘지)을 찾았다. 광주민중항쟁이 있은 지 16년만에 처음으로 망월동 방문이 허용된 것이다. 그때 그는 “14세 중학생과 60세 할머니가 우리들을 대신해 죽었다. 죽은 자가 산 자의 민주주의를 사수했다”며 통곡했다.
6월 항쟁은 그러나 그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반목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두 사람은 국민적 요구였던 대선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 그는 평민당을 창당, 독자 출마했다. ‘4자필승론’이 그 이론적 토대였지만 결과는 그의 완패(노태우, 김영삼에 이은 3위)였다. 최대의 정치적 위기였다. 반전의 기회는 곧 찾아왔다. 평민당은 1988년 4·26 총선에서 ‘황색 바람’을 일으키며 일약 제 1야당으로 떠올랐다. 그것도 잠시 1990년 김영삼·김종필씨와 노태우 대통령의 전격적인 3당 합당(민자당)으로 그는 고립됐다. 그는 1992년 14대 대선 후보로 나섰지만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 세 번째 대선 실패였다. 대선 패배 이튿날 그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가 귀국해 1995년 9월5일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79석을 얻었고 15대 대선 직전에 ‘DJP연합’을 성사시킴으로써 대권 4수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1997년 그는 4수 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한국은 IMF 외환위기에 빠져 있었다.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 일찍 IMF 차입금을 전액 상환해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 시스템을 과도하게 적용함으로써 부의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2000년 6월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성사와 남북화해·협력은 남북평화시대를 위한 그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한국전쟁 등 분단 이후 대결만 해온 남북은 대화 시대로 진입했다. 수많은 남북 인사가 양쪽을 서로 방문했고, 남북교역은 교역액이 연평균 10억달러에 이를 정도로 활성화됐다. 1980년대 단 한 차례 이뤄졌던 이산가족상봉이 10여 차례 실시됐다. 북한은 동해함대사령부가 있던 장전항을 개방해 금강산관광이 이뤄졌고, 개성공단이 설립돼 남북경협이 본격화됐다. 대북강경책을 구사하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남북은 적대 국가의 외투를 벗고 협력 국가로 재탄생했다. 남북화해·협력 작업은 그러나 다른 평가도 받았다. 남측 보수층이 주장하는 ‘퍼주기 논란’이 대표적이다. 금강산관광 대가와 개성공단의 북한 노동자 급여 등으로 북한에 지급된 적지 않은 현금이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 자금으로 전용됐다는 지적이다. 남북정상회담 등 남북화해·협력작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해 12월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가 평생을 헌신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명박 정부 들어 퇴행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권이 침해당하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제약이 심화되고 있어서다. ‘법과 원칙’의 자의적인 집행으로 집회·시위 등 언론의 자유도 제한받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과거 10년 동안 진행된 남북화해 기조는 무너지고 대결 구도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는 서거 직전에 정부를 향해 수많은 사람이 피땀 흘려 이룩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지 말라고 질타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인동초의 삶’을 마감했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죽은 자가 산 자의 민주주의를 사수했다”던 그의 망월동 묘역에서의 말처럼 이제 영면한 그가 산 자의 민주주의를 지켜줄 것인지 관심이 쏠린다. 이 키는 그가 질타했던 이명박 정부가 갖고 있는 셈이다.
김종철<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