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오 국회의장 단독 인터뷰
김형오 국회의장은 계파와 계보에서 자유로운 몇 안 되는 정치인이다. 그가 18대 국회 수장이 됐을 때 ‘기적’이라는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평가는 ‘비신사적 행위’가 난무하는 국회에 대한 개혁과 혁신의 기대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정치 부재의 상징처럼 된 직권상정의 장본인이 됐다. 그는 스스로 직권상정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언급했다.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사태 이후 중앙언론 최초 인터뷰를 통해 그의 변을 들어봤다.
올 하반기 정국은 여느 해와 다른 모습이다. 예년 같으면 정기국회를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는 시점이다. 그러나 올해는 온 나라를 벌집 쑤시듯 했던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사태의 후폭풍이 거세다. 민주당은 지난 7월22일 강행처리된 미디어법 ‘원천무효’를 위한 거당적 거리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한나라당도 민생투어라는 형식으로 거리를 헤매기는 마찬가지다. 정치권이 장외 공방으로 무더위를 달굴수록 속앓이가 깊어가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형오 국회의장이다.
8월14일 낮 국회의장실에서 만난 김형오 의장의 첫마디는 “피곤하다”였다. 미디어법 사태의 피로감 속에는 9월 정기국회를 어떻게 운영하며 또 새로운 원내질서를 어떻게 구축할지 깊은 고민이 배어 있는 듯했다.
그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의 취임 일성은 “품격있는 국회”였다. 하지만 18대 국회는 품격과 거리가 멀었다. 김 의장은 벌써 세 차례( 지난해 12월 감세법안과 올해 4월 주공·토공 통합법안, 소득세법 및 법인세법 개정안, 지난 7월22일 미디어 3법과 금융지주회사법 )나 직권상정을 했다. 직권상정은 국회 파란의 상징이며 국회 기능의 상실을 의미한다.
“정말 외국에도 못 나가겠다. 우리보다 후진국이 우리 국회의원을 갖고 놀려고 한다. 특히 국회의원도 아닌 보좌진이 의원을 협박하고, 외부세력이 국회를 봉쇄하고 의원의 행동을 억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근절돼야 한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그는 과연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것인가. 8월14일 중앙언론으로는 처음으로
미디어법 파동으로 국회는 다시 비난의 대상이 됐다.
“품격있는 국회를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다했는데 또다시 미디어법 사태로 인해 국민 앞에 얼굴을 들 수 없게 됐다. 자괴감이 든다. 폭력이 난무하는 국회를 만들려는 국회의원이 누가 있겠는가. 국회 수장의 입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의원 개개인도 많은 생각을 할 것이다. 달라진 국회를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런 일을 겪고도 바뀌지 않는다면 한국 정치의 앞날은 어둡다.”
국회 파행을 의원들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일일텐데.
“국회의원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다. 자기 책임 아래서 권리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자신의 책임을 다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흔쾌히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의원은 극소수일 것이다. 정당의 눈치를 보고 당론에 발목이 잡혀 있기 때문에 파행적 국회를 반복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당론에서 해방돼야 한다. 당론 결정 과정에서도 민주적 참여가 가능한가? 소수 강경파에 의해 주도되거나 다른 권력의 눈치를 보는 게 다반사다. 반성하자. 더 이상 국회를 폭력이 횡행하는 곳으로 만들 수 없다. 말로는 상생정치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정파적 이해와 당리당략, 대결로 치닫는 이같은 양태를 반복할 수 없다.”
국회의장 산하 국회제도개선자문위원회가 국회운영 개선 방안에 대해 연구한 것을 법안으로 만들어 상정하지 않았나.
“그렇다. 지난 6월 국회에 올렸지만 여태껏 잠자고 있다. 국회 운영위에서 정계특위로 넘어간 뒤 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상시국회와 비신사적 행위 근절 방안 등 혁신적인 내용이 포함돼 있다. 내가 의장이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나 다음(의장)을 위해서라도 국회의장은 힘이 있어야 한다. 지난 10년 동안 국회의장 권한을 줄여서 국회 파장이 계속되는 것이다. 국회의장이 양심과 권한에 따라 의사진행을 할 수 있어야 국회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의장의 권한이라고 해봐야 본회의 사회권과 직권상정뿐이다. 의사일정 작성과 질서 유지에 관한 권한은 의장에게 있어야 한다. 영국의회의 예를 들면 의장에게 두 번 경고를 받으면 국회 경위에 의해 끌려나간다. 그 이상의 행위를 하려면 감옥 갈 각오를 해야 한다. 미국 의회도 하원의장에게 규칙위원장(운영위원장)을 지목할 권한이 있다. 우리 국회는 원내교섭단체 원내대표들이 합의하지 않으면 (국회는) 꼼짝 못한다. 원내대표들은 의사일정 조정에 진을 빼니 정작 정책토론은 건성이 되기 십상이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미디어법 처리 과정의 대리투표, 사전투표 논란으로 인해 국회가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장의 중재가 있어야 하는 주장이 있다.
“법을 만드는 국회가 법을 만드는 과정의 문제로 헌재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미디어법의 합의 처리를 위해 수없이 많은 중재를 해왔다. 야당으로부터 오해받고 서운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협상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협상의지가 없었다. 헌재까지 국회 문제를 가지고 가는 것이 현실적인 정치력 부재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여야 모두 헌재 심판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미디어법 처리의 위법성 여부는 법의 심판을 기다려야 할 형편이다.”
학계조차도 방송법 처리와 관련한 일사부재의 원칙 위반을 지적하고 있다.
“(법안 처리 과정이)깔끔하지 않았다. 법률적으로 유·무효에 대해 내 생각을 밝히기가 어렵다. 재판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 재판부가 판결해야 한다. 현명하게 판단할 것으로 본다. 단 불필요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헌재가) 결론을 하루라도 빨리 내려야 한다.”
민주당은 여전히 ‘미디어법 통과 원천무효’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민주당은 미디어법을 민주주의 문제로 보고 있다. 미디어법을 이념적으로 접근하면 본질적인 문제는 결국 사장된다. 그게 안타깝다. (우리 정치권이) 회피하고 터부시해야 할 것이 바로 이념과 지역정서의 문제다. 결국 이런 문제로 결부시키니까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은 것이다. 이념의 굴레와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슬프다. 더욱이 그들이 정치적 상황을 주도하려고 하니 뜨거운 논쟁이 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놓고 논쟁해야 한다. 더 이상 이념으로 결부시키지 말아야 한다. 설령 이념적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진지하게 토론하는 성숙된 모습, 숙성된 토론문화를 보여줘야 한다.”
의장도 미디어법은 조·중·동의 문제라고 말하지 않았나.
“조·중·동의 문제라고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조·중·동을 참여시키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다. 미디어법 논란 속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논쟁은 없었다. 이념을 덧칠한 감정싸움만이 있었다. ‘재벌에 방송을 줄 것이냐’, ‘조·중·동이 방송을 장악한다’, ‘신문도 먹더니 방송도 먹는다’는 식으로 감정적인 접근을 했다. 상당히 과장된 것이다. 사실 미디어법 처리 이후 나의 홈페이지가 뜨거웠다. 나를 비난하는 글이 많았지만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미디어법의 본질을 모르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보니 구호적 차원으로 나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홈페이지를 쓰는 사람은 나름대로 미디어법에 대한 열성이 있고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조차도 재벌과 조·중·동에 방송을 귀속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니 토론이나 대화가 되겠는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상당히 수정되고 재인식돼야 한다.”
미디어법 처리 과정과 국회 운영에서 여당 쪽에는 문제가 없었나.
“당연히 한나라당도 지적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권력을 공고화시키는 민심을 얻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촛불시위, 광우병 파동,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같은 일련의 사태들이 민심과 권력이 함께하는 데까지 도달하지 못한 증거들이다. 어떤 정부든 힘으로 국민을 다스릴 수 없다. 국민의 마음에 젖어들게 하는 정권이 돼야 한다. 미디어법 자체가 이념법도 아니다. 단순화시킨다면 조·중·동 참여의 폭에 관한 문제다. 미디어법과 같은 정책은 물론 국가권력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 홍보가 안 된 것이다.”
헌재의 결론도 나지 않았는데도 정부는 미디어법 후속조치를 서두르고 있다.
“물론 법이 발효되는 시점까지는 행정행위가 중지돼야 한다. 당연한 것이다. 헌재에 들어갔든 아니든 그렇다. 정부가 선수치듯 미디어법의 후속조치를 하는 것은 잘못하면 야권의 감정을 자극할 수도 있다. (재판 결과가) 나온 뒤에 준비해도 늦지 않다. 또 헌재 판결이 나오면 또 판결에 따라야 하는 것이고….”
정기국회를 앞둔 상황에서 민주당의 원내 복귀를 위해 의장이 나설 생각이 있나.
“정치의 중심은 국회가 돼야 한다. 국회는 다양한 민의를 수렴해 방향을 정해주는 곳이다. 그런 원칙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국회 역할에 관해 질책을 받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곳은 국회다. 안타까운 것은 의원들이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광장으로 나간 점이다. 야당의원들이 촛불시위 때와 마찬가지로 미디어법을 갖고 광장으로 또 나갔다. 광장은 문제를 제기하는 곳이다. 이번 기회에 국회라는 곳은 어떤 곳인지, 의원의 역할은 무엇인지와 같은 원칙적인 문제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물론 권위주의 독재 시절에는 거리의 정치가 필요했고 국민도 인정했다.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민주당은) 빨리 (거리정치를) 접고 정기국회에 대비해야 한다.”
민주당은 의장을 ‘미디어법 5적’ 중 한 명으로 지목하고 있다.
“나를 향해 ‘5적’으로 지목하는 의원들을 보면 그들의 인격과 소양이 의심이 된다. 정말 저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미디어법 처리로 야당이 기분 좋을 리가 없을 것이다. 의장에 대해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국회의원, 당 지도자로서 그 위상에 걸맞은 언사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 정치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은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내 지역구에 와서 (낙선운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다. 내가 미디어법 합의 처리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누구보다 야당 지도부가 잘 알 것이다. 그런 의장의 지역구에서 집회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미디어법 직권상정에 대한 책임을 따지는 것이 아닌가.
“여야가 미디어법을 둘러싸고 8개월 간 논란을 거듭했다. 미디어법 때문에 민생 관련 법안들은 손도 대지 못한 채 묻혀 있었다. 민주당도 4월 임시국회에서 6월30일까지 표결처리 약속을 했다. 그 이후 합의를 번복할 만한 조건 변경이나 상황 변화가 없었다. 민주당도 정치집단이니 6월 말 합의처리 약속은 못 지킬 수도 있다. 그러나 ‘합의처리를 하겠다’는 시원한 말 한마디는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민주당이 (미디어법 회기 내) 처리 약속을 했다면 한나라당에 욕을 먹더라도 (직권상정을 반대하는 야당의 요구를) 받으려고 했다. 직권상정을 하고 싶은 의장이 어디 있겠는가. 또 지난 8개월 동안 미디어법을 제외한 다른 안건은 진전이 없었다. 중요하지 않은 법이 없다. 그 매듭을 끊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직권상정이 잘못됐다고 하면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
직권상정에 관한 시비는 어떻게 가릴 수 있는가.
“헌재의 평결이다.”
헌재 판결은 직권상정의 문제가 아니다.
“헌재에서 평결의 내용은 대리·사전투표 문제이지만 판결문에 (직권상정의 문제도) 직·간접적 인용이 있을 것이다. 미디어법을 갖고 지난 8개월 동안 얼마나 시달렸나. 의장이기에 말하지 않은 게 정말 많다. 이 부분에 대해 누구와도 공개적으로 말할 자신이 있다. 조금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
의장이 개헌을 제기했는데 좀 더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면.
“1987년 헌법체제는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기독재를 막고 민주화를 구축한 위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22년이 지나 회고해 보면 직선제 대통령 네 분이 하나같이 불행하게 청와대를 나왔다. 집권 후반부로 가면서 확연한 레임덕이 나타났다. 레임덕 현상 발생 시점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대통령이 전부 힘들게 직무를 수행한다. 퇴임 후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거나 재임 중에 자식들이 감옥에 가는 수모를 당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었다. 다른 구조로 바꿔야 한다. 역사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개헌에 다 동의할 것이다. 물론 제도가 능사는 아니다. 제도와 관계없이 운영을 잘하면 되지만 네 분의 전직 대통령 중에 소위 정치9단이라는 분들도 불행하게 퇴임했다. 정치9단도 불행하게 됐다면 제도 운영의 문제로만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야당은 개헌공론화를 썩 내켜 하지 않는 분위기다.
“야당 내부에서도 지금 개헌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야당이 개헌공론화에 앞장서야 하는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권력구도를 비롯해 판을 바꾸는 게 야당이 유리한 것이다. 여권 출신 의장이 말하니 따라가기 싫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의장이 개헌을 제기한 것은 야당 입장에서 불감청고소원이다. 야당이 하고 싶은 얘기를 의장이 대신한 것이다. 나의 개헌론 제기가 마치 대통령이 국정 쇄신과 맞물려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는데 그렇지 않다. 나의 취임 일성은 개헌이었다. 그런 얘기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불행한 역사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고 21세기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개헌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디어법이 아니었으면 좀 더 진지하게 개헌 논의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글·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