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섭의 반룡부봉과 권우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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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시절 대통령과의 ‘동행’

이명박 대통령과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가 2008년 4월 조찬을 함께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명박 대통령과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가 2008년 4월 조찬을 함께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한나라당의 강재섭 전 대표는 최근 ‘동행’의 창립식에 고문 자격으로 참석해 축사를 하며 시종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행사 시작 1시간 전부터 복도에까지 사람이 넘칠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으니 그럴 만도 했다. 흥분의 여파로 축사 도중 말이 꼬이기도 했던 그는 ‘동행’의 의미를 이같이 풀이했다.

“옛말에 나오듯이 길을 함께 가다 보면 반드시 스승이 있게 마련이다. 남을 배려하지 않거나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홀로 빨리 가려고 하면 ‘동행’이 될 수 없다.”

원래 ‘동행’은 같은 뜻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가는 동도(同道) 내지 동반(同伴)을 의미한다. 선가(禪家)에서 함께 도를 닦는 승려들을 일컬어 도반(道伴)으로 통칭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가 말한 ‘동행’은 <논어> 술이편의 다음 구절을 따온 것이다.

“세 사람이 길을 갈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 선한 것을 가려서 따르고, 그 불선(不善)한 것을 가려서 고친다.”

공자는 당사자를 포함한 3인의 동행을 예로 들어 자신을 되돌아보는 소위 ‘내자성(內自省)’의 성찰을 언급한 것이다. ‘내자성’은 2인이 동행할 경우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역시 유사한 취지의 언급을 했다.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국민들은 지금 당의 분열된 모습을 보며 크게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싸우기만 하다가는 정권을 다시 빼앗기고 말 것이다.”

지리멸렬한 여당 모습에 ‘휴식’ 끝내
‘내자성’에 입각한 맹성(猛省)을 촉구한 셈이다. 당초 그는 지난해 7월 대표직에서 물러날 때 기자들에게 “나는 PGA(‘평일골프협회’의 패러디)로 간다”는 농을 건넨 바 있다. 이는 당분간 시끄러운 여의도를 떠나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전략적 휴식을 취하겠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점에서 ‘동행’의 발족은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한나라당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휴식기간을 스스로 끝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경북 의성 출신인 그는 검사 시절에 동문선배인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의 발탁으로 청와대 비서관을 지내면서 정치권과 인연을 맺었다. 대구 서구에서 민정당 후보로 당선한 후 실세였던 박 전 장관과 박태준 전 민정당 대표의 지우(知遇)에 힘입어 대변인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던 그의 성공적인 행보는 3당합당으로 민자당이 출범하면서 이내 제동이 걸렸다. 지우지은(知遇之恩)을 베푼 박 전 장관 등이 14대 대선을 코앞에 두고 김영삼 대선 후보와 맞서 탈당을 결행한 결과였다.

장고를 거듭한 그는 결국 많은 사람의 예상을 깨고 이들과의 ‘동행’을 거부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가 이후 신한국당과 한나라당의 요직을 두루 거친 뒤 당 대표가 되어 ‘정권 탈환’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이때의 승부수가 적중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에서 박근혜 의원의 전폭 지원에 힘입어 이명박 진영을 대표했던 이재오 의원을 누르고 당 대표가 된 전죄(前罪)로 인해 ‘지우지은’을 저버렸다는 힐난을 받아야만 했다. 여론조사 지지표를 대의원 지지표의 6배수로 간주하는 전대미문의 간계(奸計)를 꾸며낸 막후 인물로 지목된 후과였다. ‘박사모 카페’에 올라온 한 회원의 울분어린 지적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가 경선 때 이 후보를 돕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3년이다. 다시는 그에게 속았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이들은 그가 14대와 17대 대선에서 두 차례에 걸쳐 ‘지우지은’을 저버린 배신의 행보를 보였다고 비난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총선 때 후보 등록 마감 직전에 그가 문득 불출마를 선언한 것도 이런 원망(怨望)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당시 그의 주변에서는 공천 잡음으로 인한 내홍(內訌)을 잠재우기 위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결단으로 평가했으나 정반대의 해석도 나왔다.

“그의 지역구에 홍사덕 전 의원이 출사표를 던지자 사세불리(事勢不利)를 절감한 나머지 불출마를 선언한 것으로 ‘살신성인’은커녕 ‘고육지책(苦肉之策)’에 불과할 뿐이다.”

조선조 때 의리를 중시한 남인(南人) 세력의 아성인 대구의 경우 ‘지우지은’을 저버린 자에 대한 비난의 강도가 훨씬 높다는 점에 비춰 터무니없는 지적으로 볼 수만도 없다. 실제로 문민정부 당시 미운털이 박힌 박철언 전 장관은 ‘빠찡꼬 사건’으로 전격 구속되자 부인을 내세워 대구시민들의 ‘의리’를 자극하는 수법으로 사실상의 옥중 당선을 성사시킨 바 있다. 그러나 그의 행보를 ‘지우지은’을 저버린 배신의 행보로 매도하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치다.

원래 통상적인 ‘지우지은’과 달리 용봉(龍鳳)의 인물로부터 ‘지우’의 은혜를 입는 것은 특별히 ‘권우지은(眷遇之恩)’으로 표현한다. 이는 난세의 상황에서는 개인 차원의 ‘지우지은’보다 국가 차원의 ‘권우지은’이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에 따른 구설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두 단합해 대통령 도와줘야 한다”
춘추시대에 첫 패업을 이룬 관중(管仲)의 변절 행보를 두고 200년 뒤 공자의 제자들이 강력히 이의를 제기한 게 그 실례다. <논어> 헌문편에 그 일화가 나온다.
하루는 자로가 물었다.
“제환공(齊桓公)이 공자 규(糾·제환공의 이복형)를 죽이자 규의 신하 소홀(召忽)은 그를 위해 죽었으나 관중은 죽지 않았습니다. 관중을 어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제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하며 병거(兵車·전쟁)를 동원치 않은 것은 모두 관중의 공이다. 그 누가 그의 어짊만 하겠는가.”
자로는 관중이 주군과 함께 죽지 않은 것을 이유로 비난코자 했으나 공자는 제환공에게 귀의한 관중이 이룬 패업을 근거로 오히려 그를 칭송하고 나선 것이다. 훗날 관중은 자신의 변절 배경을 두고 개인 차원의 소의(小義)와 소절(小節)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 차원의 대의(大義)와 대절(大節)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공자는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지우지은’ 대신 ‘권우지은’을 택한 관중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그가 ‘동행’의 간판을 내건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난해 말 부군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영욕(榮辱)을 함께 한 삶을 그린 이희호 여사의 <동행> 출간 취지와 별반 차이가 없는 셈이다. 그의 축사가 이를 방증한다.

“향후 2~3년은 이 대통령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모두 단합해 도와줘야만 한다. 나는 ‘동행’을 중심으로 열심히 정책을 만들어 지원하도록 하겠다.”

이 대통령과 명운을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셈이다. 청와대를 의식한 그의 이런 발언은 <한서>에 나오는 ‘반룡부봉(攀龍附鳳)’의 취지와 상통한다.

원래 한고조 유방은 패현(沛縣)의 일개 정장(亭長)에 불과했다. ‘정장’은 10리마다 세워진 ‘정(亭)’의 치안과 소송 담당관원으로 지금의 파출소장에 가깝다. 신분이 미천했던 까닭에 그의 주변에 몰려든 인물 역시 한(韓)나라의 명족 출신인 장량(張良)을 제외하면 모두 천인 출신이었다. 가장 학식이 높은 부류에 속하는 소하(蕭何)와 조참(曹參)도 패현의 아전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그야말로 시정의 무뢰배나 다름없었다. 유방의 처제와 결혼해 동서가 된 번쾌(樊 )는 개백정, 관영은 비단장수, 하후영은 관아의 마부에 불과했다. 다만 유방이 함양을 공격할 때 천하쟁취의 계책을 일러주며 뒤늦게 합류한 역이기는 집안이 가난해 마을의 감문(監門·문지기)을 지낸 소리 출신이기는 했으나 학문이 제법 깊었다. 그러나 그의 천거로 부장(副將)이 된 동생 역상은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와 대공을 세우기는 했으나 학문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훗날 <한서>의 저자 반표(班彪)는 번쾌와 하후영, 관영, 역상 등의 열전을 쓰면서 이같이 총평했다.

“번쾌 등 4인은 미천한 신분으로 용린(龍鱗·용의 비늘)을 끌어 잡고 봉익(鳳翼·봉황의 날개)에 붙어 제후에 봉해졌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은 첩첩산중
여기서 ‘반룡부봉’과 ‘반부(攀附)’라는 성어가 나왔다. 이는 반표가 한제국의 건국을 높이 평가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난세의 상황에서 천하대세의 흐름을 읽고 영주(英主)를 붙좇아 평천하의 대공을 세운 탁행(卓行)을 의미한다. 공자가 ‘지우와의 동행’을 버리고 ‘권우와의 동행’을 택한 관중을 칭송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반부’ 행보를 무턱대고 배신의 행보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난세의 시기에 ‘반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참화를 면키 어렵다. 숙종조의 정언 홍현보는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세조에게 ‘반부’하지 않아 멸문지화를 당한 황보인과 김종서를 두고 이같이 혹평한 바 있다.

“두 사람은 세조에게 ‘반부’하지 않은 까닭에 극화(極禍·참화)를 입은 것은 물론 아직까지도 죄적(罪籍)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넘어야 할 산은 첩첩준령이다. ‘동행’ 출범 나흘 전에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정몽준 최고위원도 ‘해밀을 찾는 소망’을 개설한 바 있다. 그 역시 자타가 공인하는 차기 주자 중 한 사람이다. 베이징에 머물고 있는 이재오 전 최고위원도 조만간 귀국해 본격 행보에 나설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영주’로 선택해 ‘용봉’이 된 이 대통령이 과연 그의 ‘반부’에 감심(感心)해 힘을 실어줄지 여부다. 일각의 다음과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이 대통령은 스스로 알아서 일을 챙기는 사람을 중시한다. 자력으로 서지 못할 경우 계륵(鷄肋)으로 치부될 공산이 크다.”
많은 사람이 ‘동행’의 출범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의 ‘반부’가 관중과 같은 차원에서 이뤄진 사실이 널리 인정받을 경우 크게 괘념할 것도 없다. ‘동행’의 취지에 이의를 달 사람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신동준<21세기정경연구소장> xhind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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