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전격적 개헌 제의로 여권의 갈등 차단·대선구도 흔들기 등 모색

열린우리당 전현직 지도부가 1월 7일 서울 서교동의 한 음식점에서 모여 신당창당 등 당의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김근태 의장, 천정배 전 법무장관, 정동영 전 의장, 김한길 원내대표, 김혁규 전 최고위원, 문희상 전 의장, 정세균 전 의장대행(가운데 오른쪽 방향으로).
정치권이 흔들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개헌담화를 통해 국회와 대통령에게만 있는 개헌발의권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천명했다. 노 대통령은 “정략적 의도는 전혀 없다”며 ‘각본정치’를 부인하면서 “안정적 국정운영을 위해 4년 연임제 개헌이 필요하다”고 개헌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꿍꿍잇속’을 안다는 듯이 한층 몸을 움츠리고 있다. ‘무대응’을 당론을 정했다. 대선주자와 국회의원들에게 개헌과 관련된 것은 함구령을 내렸다. TV토론이나 라디오 대담프로그램의 출연도 당의 허락을 받을 것을 주문했다. 원희룡·권오을·박형준 의원 등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무조건 반대가 아니라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당 지도부의 ‘엄한 명령’에 목소리를 낮추고 말았다.
여권 내 신당파·사수파 내홍 ‘잠잠’
노 대통령이 제안한 개헌에 어떤 복선이 있기에 한나라당은 이처럼 ‘안전행보’만 하려는 것일까. 개헌 필요성은 정치권과 학계에선 간간히 제기됐던 문제지만 국민 사이에서 공론화되기는 사실상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정치의제인 것이다. 노 대통령이 직접 새로운 이슈 제기를 통해 정치의제를 전환하고 나선 것이다.
6월항쟁 결과로 탄생한 ‘87년체제’는 집권연장을 통한 장기집권을 차단하기 위해 5년 단임제를 채택했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는 민주적 토양이 비옥해진 반면 조기 레임덕 발생으로 단임제 폐해가 크다는 지적이 있다. 대표적인 폐혜가 대통령 임기 중의 모든 선거는 ‘중간평가’ 성격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결국 장기적인 국가적 안목과 세계의 흐름과 동떨어진 인기영합적 정책을 난발하거나 아니면 여소야대 정국을 양산하는 국정의 안정적 기반을 구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게 헌법학계 일각의 견해다. 그것은 곧 국정운영을 책임진 최고통치자에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는 문제다. 이런 부작용을 손질하기 위한 개헌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문제의식이 있다고 즉각적인 개선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당위론에서 현실론으로 바꾸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한나라당이 개헌저지선(100석) 이상을 장악하고 있고 개헌절대 반대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헌법 개정을 위해선 국회 제적 의원 3분의 2의 찬성이 필요하다. 따라서 열린우리당·민주당·민주노동당·국민중심당 그리고 무소속 의원들이 전원 동조한다고 해도 여기에 한나라당 소속 의원 30명 가까이 추가 동조를 해야 한다. 한나라당은 당 지지율이 50%를 육박하고 있다. 당연히 한나라당은 정국변화를 원치 않는다.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은 오직 대선에만 관심이 있다”고 주장을 했다.
이런 현실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개헌론을 제기한 속내는 노 대통령이 개헌제안을 통해 대선구도를 흔들려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김형준 국민대학교 대학원 부원장은 “현재의 선거구도에는 여당이 없다. 오직 한나라당 쪽의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만이 보일 뿐이다”면서 “노 대통령은 이를 조기에 차단하지 않으면 정권재창출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고 말했다. 대선구도에서 여권이 없는 것은 여당의 정책실패와 여권의 분열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분열을 막고 결집할 수 있는 이슈제기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바로 그 점에 착안해서 정치적 논쟁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 개헌을 들고 나온 것이다. 개헌론이 나오자 통합신당파, 당사수파 할 것 없이 개헌론에 찬성의사를 보냈다. 선도탈당론, 당사수파와 통합신당파의 세력다툼, 통합신당파 내에서도 중도세력파와 개혁파의 이념투쟁으로 사분오열됐던 열린우리당의 내홍이 일거에 ‘잠복’했다.
김형준 부원장은 “여권의 갈등 차단을 통해 노 대통령의 힘을 보여줬고 그것은 ‘나를 무시하지 말라. 결코 식물대통령이 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야당에도 준 것”이라고 해석했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도 “‘내가 살아 있다’ ‘레임덕 현상,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주 목적이다”라고 분석하면서 “개헌론이 열린우리당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이냐는 문제도 별개의 사안”이라고 말했다. 손호철 교수의 지적은 정계개편과 개헌의 함수관계가 간단치 않다는 얘기이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개헌은 개헌이고 미래는 미래다”라고 말했다. 개헌과 정계개편이 별개의 사안이라는 얘기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도 비슷한 입장이다.
“오직 개헌 찬반세력만 있을 뿐”
그러나 별개의 사안일 수가 없다는 것이 정치권의 일치된 시각이다. 노 대통령의 개헌 발의 시점이 오는 2월 14일에 열릴 예정인 전당대회 전이냐 후이냐에 따라 정치적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만일 전당대회 이후라면 정계개편에 상대적으로 적은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 이전이 된다면 양상은 달라진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도 “개헌발의를 하면 곧 국회동의 절차에 들어가야 한다”고 전제하고 “여당의 입장에서 국회표결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반대표를 던지기 어렵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도 “여당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당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고 해 개헌론이 여권의 정계개편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인정했다. 노 대통령의 ‘택일’(개헌발의일)에 의해 열린우리당이 주도하는 정계개편의 방향을 바꿀 수가 있다는 얘기다. 유종필 민주당 대변인은 “열린우리당을 끌어안고 가겠다, 더 나아가 여권 후보 결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도 같은데 잘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호철 교수도 “개헌론에 의한 여권의 종전 지지기반(호남과 충청)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냐”는 질문에 “판단이 어렵다”면서도 “개헌이라는 명분 아래 뭉치는 것인데 범여권 세력이 연대는 가능할지, 또 노 대통령과의 관계 재정립이 될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어떻든 정국주도권이 노 대통령에게 돌아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2007년 대선의 게임룰에도 변화가 왔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의 한 측근은 “개헌논의 촉발로 인해 당분간 대선전선에 열린우리당은 사라질 것”이라면서 “오직 개헌 찬성 대(對) 개헌 반대만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런 구도에서 정국의 중심에는 개헌을 주창하는 노 대통령과 이에 반대하는 한나라당만 있다. 이를 국민 지지세력으로 구분하면 개헌에 찬성하는 세력은 2007년 신헌법체제를 창조하는 집단이고, 개헌에 반대하는 세력은 1987년 구헌법 체제를 고수하려는 집단이 되는 것이다. “개헌 지지층이 범여권과 겹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개헌 추진이) 범여권 통합의 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ay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