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종 본부장 지난해 하반기 중남미 순방 때 한·미 FTA 협상 절박성 토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총괄하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김현종 외교통상교섭본부장이다. 범정부적 대응이 필요한 한·미 FTA 협상이지만 통상교섭본부가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통상교섭본부와 김 본부장에 보내는 신뢰의 정도를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김 본부장이 노 대통령을 설득, 한·미 FTA의 추진 사인을 받았고 FTA에 관한 한 노 대통령이 김 본부장에게 힘을 실어주기 때문이라는 게 정부 관계자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김 본부장이 어떤 과정을 통해 국가적인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한·미 FTA협상의 사실상의 ‘전권’을 갖게 된 것일까.
한·미 FTA협상의 신호탄은 노 대통령이 지난 1월 18일 신년연설에서 쐈다. 노 대통령은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어야 한다”며 “조율이 되는 대로 협상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일 협상에서 급속히 한·미 논의로

한·미 FTA 2차 협상 마지막날인 7월 14일 협상이 결렬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 마련된 회담장이 텅 비어 있다.
게다가 외교통상부 자유무역협정국은 이날 2월 한·미 FTA 추진 관련 공청회를 예고했다. 이 예고는 이미 한·미 FTA 물밑협상이 상당히 진척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낳았다. 관측은 불과 보름 뒤인 2월 5일 한·미 FTA 개시선언으로 현실화됐다. 개시선언 직후 정부는 노 대통령이 던진 한·미 FTA 화두를 집중 홍보했다. 김 본부장은 국정브리핑에 “한·미 FTA는 국민소득 3만 달러의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개혁과 개방의 시험대이다. 낡은 일본형 시스템을 버리고 미국형으로 우리 경제를 개조하자”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이런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 때문에 김 본부장에게 이목이 집중됐다. 특히 김 본부장은 2005년 9월 유럽과 중미순방 수행 때 노 대통령과 독대했다. 정태인 전 국민경제비서관은 “노 대통령은 국내에 있을 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단독면담을 하지 않는다”면서 “김 본부장이 코스타리카에서 한·미 FTA 협상의 절박성을 설득했다는 게 정설”이라고 말했다. 정 전 비서관은 “2004년까지만 해도 한·미 FTA는 중장기계획으로 설정된 상태였다”면서 “노 대통령의 우선적 과제는 한·일 FTA였다”고 말했다.
한·일 FTA는 2004년 11월 협상이 중단됐다. 민주노동당 서준섭 정책위원은 “김 본부장이 한·일 FTA 협상에 실패한 후 급속히 한·미 FTA 논의를 진척시킨 것 같다”면서 “노 대통령이 FTA 협상 전권을 가진 김 본부장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미국의 통상압력도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도 7월 13일 2005년 6월부터 2006년 2월까지 한·미 FTA 관련 정부 대외비 관리문서목록을 분석한 결과를 공개하면서 “노무현 정부는 한·미 FTA 재개와 미국의 한·미통상현안 해결 압력에 굴복해 2005년 9월 이후 갑작스럽게 협상을 추진한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김현종 본부장이 미국 정·재계 인사와 만난 후 FTA가 추진된 정황으로 볼 때 통상압력에 굴복해서 시작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도 “미국이 다자간 체제에서 양자간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며 “이는 WTO(세계무역기구)와 DDA(도하개발어젠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등 다자간 협정체제로 경제적 이득을 보지 못하자 양자간 협정체제로 전환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태인 전 비서관은 “한국이 양자간 협정체제의 실험모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현종 본부장의 얘기는 다르다. 2005년 12월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인 민주노도당 심상정 의원의 방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미 FTA 협상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 김 본부장은 “풀어야 할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다”면서 “당분간 협상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물론 한·미 FTA에 대한 연구는 2003년 5월 외교통상부에 들어오면서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의했다는 주장도 있다. 열린우리당 한·미 FTA특위 간사인 임종석 의원은 “한·미 FTA를 통해 양국관계를 군사력 위주의 안보동맹에서 동일경제권으로 묶는 경제동맹으로 확대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매우 강하다”며 “이런 의지를 협상책임을 맡고 있는 김 본부장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찌됐든 김 본부장 지휘하에 한·미 FTA 협상단이 꾸려졌다.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와 함께 재정경제부, 산업자원부, 보건복지부, 농림부, 노동부 등 각 부처 통상인력, 국책연구기관 전문가가 모두 가세했다. 국내외 통상법률 전문 변호사 자격증 소지자만 20명이다.
최고의 통상전문가들로 드림팀 구성
FTA 협상에 나서는 우리측 대표단을 이끄는 야전사령관은 외교통상부의 김종훈 대사. 외시 8회로, 32년차 베테랑 외교관인 김 대사는 “사안의 중요성만큼 각 분야 최고 통상전문가들로 드림팀을 구성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김 대사는 2000년 한·중 마늘파동, 유럽연합과의 선박분쟁 당시 진두지휘하며 협상을 이끄는 등 풍부한 경험을 가진 협상의 대가로 꼽힌다.
이혜민 한·미 FTA 기획단장은 외교부 내의 대표적인 통상전문가다. 서울 법대와 프랑스 클레몽 페랑 대학원에서 공법·정치학 석사를 받은 그는 북미통상과장과 OECD공사참사관, 지역통상협력관을 지내면서 1998년 한·미투자협정, 99년 쇠고기 협상, 유럽연합과의 지적재산관 협상 등에 두루 참여했다.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농업분야는 20년 이상 국제통상전문가로 활약한 농림부 배종하 국제농업국장이 챙긴다. 그는 얼마 전 한·칠레 FTA 체결과정에서 시행착오와 아픈 기억들을 자전적 회고담을 통해 밝히기도 했다.
금융분과장인 신제윤 재정경제부 국제금융심의관은 국제금융분야 전문가로 전국경제인연합회에 파견근무한 경력도 있어 민간경제에 능통하다. 재경부 금융정책과장과 국제금융과장을 거친 정통 재무관료로, 91~95년 1차 금융시장개방 협상 및 우리나라의 OECD 가입 협상 때 실무진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정부조달분과를 이끄는 안명수 통상교섭본부 다자통상국장은 북미통상과장, 주 제네바 참사관, 통상법률지원팀장 등을 지냈다.
여성인력이 대거 포진한 것도 특징이다. 전체 협상단 중 여성이 25%나 된다. 외교통상부 남영숙 FTA 제2교섭관과 유명희 자유무역협정서비스교섭과장은 전체 17개 분과 중 각각 통신·전자상거래와 서비스분과장을 맡았다. 미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0년간 OECD와 국제노동기구에서 활약했다. 세계무역기구 보조금협상, 한·싱가포르 FTA 협상타결 등 굵직한 국제협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유 과장은 일찌감치 ‘한국의 칼라힐스’라는 별명을 얻으며 통상전문가로 인정받은 바 있다. 서울대 영문과와 동대학원 행정대학원, 미국 벤더빌트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유 과장과 함께 공동으로 서비스분과장을 맡은 김영모 재경부 통상조정과장은 미국 하버드대 석사 출신으로 국제경제과장을 거쳤다.
김경은·박경은<산업부> 기자 jj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