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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권 구도를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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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정계개편론 공언… 한나라당 중심으로 한 전선 형성과 허물기 시도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해 8월 대연정 제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해 8월 대연정 제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新)대권지도를 만드는 게 열린우리당에 떨어진 지상명령이다.”
5·31지방선거과정에서 정치권에 빅뱅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지난 5월 24일 ‘선거참패’를 전제로 ‘평화·민주·개혁 세력의 규합을 공언하면서 사실상 정계개편의 논의는 시작됐다. 정 의장은 “수구세력의 재집권을 막을 세력은 열린우리당밖에 없다”면서 “5·31지방선가 끝나고 열린우리당이 구심점이 돼 민주·평화·개혁세력을 하나로 묶는 통합을 추진하겠다. 힘을 달라”고 호소했다.

정계개편 추진은 ‘대선지도’를 바꾸는 지각변동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게 정가의 일반적 시각이다. 5·31지방선거 결과에서 비롯된 정계개편 논의는 여권의 역학구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정동영 의장의 책임론이 예상되는 가운데 제기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선거참패 책임론 피해가기?

정동영 의장이 주도하는 정치실험에 대한 전망은 현재로선 밝지 않다는 게 정가의 일반적 분석이다. 정 의장은 이미 선거 참패로 인해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될 가능성이 크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열린우리당 염동연 사무총장, 유인태·최재천 의원 등은 “이번 선거결과는 특정인의 책임이 아니다”며 선거책임론에 대해 사전 차단에 나섰다. 다분히 선거과정에서 전략적 고려가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당장 통합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민주당의 반응 역시 시큰둥하다. 민주당은 “곧 없어질 당과 무슨 통합이냐”(유종필 대변인)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화갑 민주당 대표도 “선거가 불리할 때마다 쓰는 구태의연한 술수”라면서 “선거가 끝난 뒤 불거질 지도부 책임론을 정계개편으로 회피하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민노당도 “열린우리당은 정계개편을 추진할 힘이 없다”고 말했다.

어떻든 정치질서의 개편은 중심기둥이 튼튼하고 힘이 있을 때 가능했다는 게 역사적 경험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3당통합과 DJP연합이다. 3당통합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울 올림픽대회의 성공적 개최와 3저 호황이라는 기반 아래서 헌정사상 최초의 여소야대정국을 ‘타파’했다. 호남과 충청의 지역적 연합인 DJP연합도 마찬가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선후보인 이회창 전 총재가 아들 병력문제로 최저점의 지지율을 보일 때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손을 잡았다. ‘집권가능성’이라는 미래의 권력을 이용한 정계개편이었던 셈이다.

왼쪽_포옹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오른쪽)과 김근태 최고위원.<br>오른쪽_지난 5월 18일 열린 민주화운동기념식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왼쪽)와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_포옹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오른쪽)과 김근태 최고위원.
오른쪽_지난 5월 18일 열린 민주화운동기념식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왼쪽)와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지방선거 이후의 정계개편론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은 공멸의 위기에서 어떤 형태든 돌파구를 찾기 위한 집권여당의 ‘작업’이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에 기초한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정몽준 의원의 후보단일화는 결국 위기가 만든 ‘대도박’이었다. “여권의 입장에서 정계개편은 생존의 문제로 다가왔다”는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의 말도 이런 맥락이다.

5·31지방선거가 본격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기자들에게 “누구에게 줄을 서야 하느냐”고 묻곤 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는 그런 얘기를 입에 담는 의원이 거의 없다. 밝지 않은 대선에 대해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연대 혹은 이념중심 연합

현재 상황에서 예견되는 정계개편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과거 DJP연합 복원과 같은 지역연대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중심의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역의 대표성을 놓고 정동영 의장, 김근태 최고위원 그리고 고건 전 총리 등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구도가 예상된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5·31지방선거 과정에서 최대의 수혜자는 대권예비후보 경쟁에서 선두로 치고 나온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아니라 고건 전 총리”라면서 “열린우리당 창당 정신을 따지기 앞서 열린우리당이 회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역연대”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은 고 전 총리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사실 정동영 의장도 고 전 총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정 의장은 민주당과의 당 대(對) 당 통합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에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반(反)한나라당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면서 “이 과정에서 열린우리당이 단단한 구심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고건 전 총리와의 연대와 관련해서도 “지방선거 이후 협력을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12일 고 전 총리를 만난 직후에 정 의장은 ‘선(先)자강론’을 주창했다. 잠재적 경쟁자인 고 전 총리에 대한 견제구였다. ‘강한 열린우리당’을 만들어서 고 전 총리를 여권의 ‘구원투수’로 등용할 기회조차 주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정계개편에는 해결해야 할 전제조건이 있다. 우선 노무현 대통령의 거취다. 민주당은 통합논의 전제로 노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탈당을 주문하고 있다. 민주당 김경재 전 의원은 “노 대통령의 탈당은 열린우리당 창당에서 시작된 노무현식 정치실험의 실패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의미”라고 전제하면서 “노 대통령의 탈당이 없이 새로운 정당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말했다.

고건 전 총리(왼쪽)와 김근태 최고위원이 지난 2월 만나 악수하고 있다.

고건 전 총리(왼쪽)와 김근태 최고위원이 지난 2월 만나 악수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거취문제에 대해서는 탈당 여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한나라당 공성진 의원은 “정동영 의장이 선거 패배의 공동책임론을 들고 나올 것”이라면서 “노 대통령은 이를 자신의 탈당 압력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이를 수용한다면 정치판은 빅뱅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노 대통령의 탈당 가능성을 점치면서도 그것은 곧 열린우리당의 분열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고 전망했다. 친노그룹의 이탈을 점치는 것이다. 손 교수는 “노 대통령의 전매특허는 ‘전선정치’”라면서 “노 대통령의 탈당은 열린우리당의 분열로 이어지고 노 대통령의 핵심 기반 세력들이 새로운 당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들은 “고건 전 총리를 영입하는 문제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고 있다. 고 전 총리를 당 의장으로 모시는 방안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아직까지 사적이고 비공식적인 의견에 불과하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선거 이후에 문제제기는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당 차원에서 혹은 대권후보 차원에서 고 전 총리를 ‘우군화’하기 위한 작업을 가속화시킬 전망이다. 특히 열린우리당 내에서 김근태 최고위원도 전당대회 때 민주개혁세력 통합을 제안했고 고 전 총리와의 연대를 가시화하려는 정치적 액션을 취했다. 당내에서 이에 대해 “김 최고위원이 기능주의적 진보주의로 변신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물론 공을 가장 많이 들이고 있는 곳은 민주당과 한화갑 대표임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이에 고 전 총리는 철저히 말을 아끼고 있다. 고 전 총리와 가까운 한 인사는 “최대의 정치시장은 선거”라고 전제하면서 “그런 절호의 기회에서도 자제해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 전 총리가 대선 막바지까지 멀리 보고 정치적 행보를 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만일 노 대통령의 탈당 혹은 개헌논의 공론화 등 파괴력 높은 이슈가 제기되면 고 전 총리도 가시적인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노 대통령 거취가 선결과제

‘열린우리당의 참패=노 대통령 탈당’을 등식화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는 게 그런 분석의 한 가닥이다. 노 대통령의 탈당은 국정운영에 즉각적인 차질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강용진 국민대 겸임교수는 “노 대통령이 탈당에 대해 실기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면서 “그렇지만 개헌 혹은 남북정상회담을 명분으로 탈당 카드를 내놓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헌 역시 정계개편의 중요한 변수 중 하나다. 문제는 개헌 내용과 시기다. 정동영 의장도 “권력구조에 국한된 제한적인 개헌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공성진 의원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바뀌는 과정에서 누군가 불을 당겨야 하는데 노 대통령이 조기퇴진을 통한 개헌론을 제기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가 현재 개헌에 반대하고 있는 것은 선거과정에서 이용당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각당과 대권후보의 이해가 절충되는 선에서 개헌논의가 재개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선거 패배로 열린우리당이 구심점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정국의 흐름을 좌우하는 승부사 기질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인 셈이다.

개헌 시기와 관련해서도 각당의 입장이 다르다. 정 의장은 내년, 박근혜 대표는 2007년 대선 이후를 적기로 거론했다. 여당의 공통분모는 지방선거 직후다.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열린우리당 일각에서 창당정신을 살리는 이념 중심의 정계개편도 상정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 방식은 열린우리당의 분열이라는 진통을 감수해야 한다. 열린우리당은 현실적 상황을 중시하는 기능적 진보주의 세력와 개혁성향을 중시하는 이념적 진보주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다. 기능적 진보주의 세력은 실용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반면 이념적 진보세력은 열린우리당의 창당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문재인 전 청와대 민정수석도 “열린우리당 창당정신을 버려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박기태 경주대 교수는 “두 세력이 선명성에서 일치되지 않는다”면서 “이 논쟁이 불거진다면 당 대 당 통합논의가 아니라 의원들의 지역성과 개인적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계개편은 대선정국에서 최대의 화두다. 이 화두는 새로운 선거구도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열린우리당이 제시한 ‘평화·개혁·민주세력 통합’은 한나라당 대(對) 반한나라당 구도이다. 1997년과 2002년 대선 역시 그랬다. 결국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전선만들기와 허물기가 정계개편 논의의 핵심이 될 전망이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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