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인도와 일본, 그 특별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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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생전 정치적 행보 때문에 한국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자체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인도는 사망 발표 다음 날을 국가적으로 애도하는 날로 정하고, 온 나라가 아베 전 총리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전 세계가 등을 돌린 러시아의 손을 끝내 놓지 않는 것부터, 온 나라가 아베 전 총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도의 모습에 많은 한국인은 의아함을 느끼며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의 ‘적’과 동지처럼 지내는 인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지요.

2015년 인도를 방문한 아베 총리가 모디 총리와 회담하고 있다. / AFP-JIJI

2015년 인도를 방문한 아베 총리가 모디 총리와 회담하고 있다. / AFP-JIJI

인도와 일본의 오랜 관계 근대사에서 인도와 일본의 관계는 16세기로 거슬러 갑니다. 인도의 고아(Goa)는 당시 포르투갈 동인도회사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의 배를 타고 자주 일본을 방문하던 인도인들은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믿었는데, 1596년 일본의 기독교 박해 때 많은 일본 기독교인들이 고아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대사에서 인도와 일본의 관계는 메이지시대 때 정치적 교류가 시작됐고, 1904년 일본-인도협회를 설립했습니다. 영일동맹 종료 이후 많은 인도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으로 탈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43년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영국을 대신해 징병된 인도군 4만5000명이 싱가포르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던 중 항복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인도 내에서 영국에 저항하던 인도국민군(Indian National Army)에 합류했습니다. 이 군대를 결성한 사람은 당시 국민회의에서 이탈해 민족운동을 하던 벵골 출신의 민족주의자 수바시 찬드라 보스(Subhash Chandra Bose)였습니다. 보스는 당시 영국군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으로 일본군과 협력했습니다. 이 인도국민군은 일본군과 함께 내륙에서 인도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인도 동부로 들어가기 위해 버마(미얀마)를 통해 인도 동부를 공격해 델리로 진격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패배하면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인도국민군이 영국의 식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인 일본과 협력했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한 사실입니다. 당시 인도 민족주의 단체는 ‘적의 적은 우리의 친구다’라는 이이제이(以夷制夷)와 유사한 태도를 취했는데요, 아직까지도 논란의 소지가 있는 사건입니다.

아베 전 총리가 인도에 갖는 의미 아베 전 총리는 2014년 인도 공화국의 날 퍼레이드에 주빈으로 참석합니다. 양국의 관계는 1980년부터 인도가 ‘동방정책(Look East)’의 주요 파트너로 일본을 설정하면서 꾸준히 이어오던 중 1998년 인도가 핵무기 실험 ‘포크란 II’를 실시하면서 일본이 교류 및 경제지원을 중단하는 제재를 가하며 악화했습니다. 3년 후 일본이 제재를 해제하면서 인도와 일본의 관계는 다시 급속도로 회복됐습니다. 아베 전 일본 총리의 행사 참여는 이러한 관계 회복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제스처였습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2014년 나렌드라 모디가 인도 총리 취임 후 일본을 방문하며 양국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인도와 아베 전 총리는 특별한 관계였음이 분명합니다. 확실히 그가 인도에 공을 들인 것은 분명하고, 인도 역시 그를 특별대우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그의 인도 방문 횟수만 보더라도 첫 재임기간인 2006년에서 2007년 동안 1회 방문하고, 두 번째 재임기간인 2012년에서 2020년 동안에는 총 3회 방문하며 역대 일본 총리 중 최다 방문 횟수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외국의 지도자가 인도 국회에서 연설하고, 2021년 1월 인도 정부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들에게 수여하는 국가 훈장으로는 최고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나라의 보석) 훈장 다음으로 높은 상(賞)인 파드마 비브후샨(Padma Vibhushan·연꽃 훈장)을 받는 등 인도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과연 아베 전 총리는 인도에 어떤 의미였을까요? 인도 내에서는 그가 재임기간에 인도와 일본의 관계를 특별 전략적 및 글로벌 파트너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2007년 첫 인도 방문 시 아베 전 총리는 국회에서 지금의 쿼드(Quad)를 만든 ‘인도-태평양’ 개념의 토대인 ‘두 해양의 합류(Confluence of the Two Seas)’를 연설했습니다.

인도국민군을 결성한 인도 민족주의자 수바시 찬드라 보스 / 인도 퍼블릭 도메인

인도국민군을 결성한 인도 민족주의자 수바시 찬드라 보스 / 인도 퍼블릭 도메인

중국에 대항하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를 나눈 양국의 정상은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협력을 진행합니다. 첫째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은 인도가 일본과 민간 원자력 협정인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에 관한 협력 협정’을 체결하면서 민감한 ‘핵’문제를 해결합니다. 당시 아베 총리는 일본 내의 반핵파들이 협정에 동의하도록 설득하는 데 기여했는데, 이 협정을 맺음으로써 인도는 일본 회사가 소유 또는 지분을 갖고 있는 미국과 프랑스의 원자력 기업과 거래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뭄바이~아흐메다바드 고속열차 도입, 뭄바이~델리 고속도로 건설, 2+2 외교부 장관 회담, 군수지원 협정, 국방 장비 및 기술이전 협정 등 경제적·정치적·전략적 부문에서 다양한 협력을 추진해왔습니다. 그렇다 보니 인도로서는 자국의 현실적 문제들을 지적하며 망설이는 여느 국가들보다 장기적 비전과 정책, 계획을 갖고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일본, 특히 이를 적극 진두지휘한 아베 전 총리가 그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고 협력할 수 있는 ‘친구’로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베의 부재 이후, 양국관계 향방은? 일본은 2000년부터 2019년까지 누적 외국인직접투자(FDI)가 300억달러로 인도 전체 FDI의 7.2%로 6위를 차지했습니다. 아베 전 총리 재임기간에 FDI 비중이 11%대를 차지한 적이 2차례 있었는데, 2022년 들어서는 코로나19 등의 여파로 2%대의 비중으로 현저히 줄어든 상태입니다. 일본의 대인도 투자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습니다. 특히 제조와 인프라 분야 비중이 높습니다. 투자는 일본국제협력단(JICA)을 통해 약 70개의 프로젝트를 벌이고 있습니다. 연평균 약정액이 3480억엔 이상입니다.

남아시아에 가보면, 일본이 각 국가의 경제구조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듯이 인도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자금 지원·인프라 투자 등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향력 확대는 아베의 재임 시절 확실히 가속도를 나타냈습니다. 2022년 3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향후 5년간 420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하겠다는 발표를 한 바 있어 향후 이 정책은 유지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만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와 미국,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인도가 아베의 부재 이후 그의 기여도가 컸던 쿼드 체제에 얼마나 더 결속력 있게 임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부분 같습니다.

<한유진 스타라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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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오늘을 생각한다
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