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정치판에 뛰어든 책방 사장님들

이해찬·김문수·이치범·김부겸 등 서점 운영하며 ‘민주화’ 꿈 다져

이해찬 전 총리, 김문수 경기지사, 이치범 전 환경부 장관, 김부겸·김영환·조승수 의원, 우원식·선병렬 전 의원, 강병기 전 경남 정무부지사….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_이해찬, 김문수, 김부겸, 조승수, 우원식, 선병렬

‘빨간 책’(소위 ‘불온한’ 사회과학서적)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당해야 했던 권위주의 시절, ‘빨간 책’을 판매하는 서점을 운영한 정치인들이다. 1980년대 당시 사회과학서점은 단순한 책가게가 아니었다. 민주화운동을 위한 의식공동체의 거점이었다. 민주화된 세상을 설계하는 나침반의 역할도 했다. 우원식 전 의원은 “사회과학서점 운영은 일종의 이념운동이었다”면서 “사회과학서적상들이 학생·노동운동과 결합해서 운동이념의 수입과 보급투쟁을 했다”고 말했다. 당연히 당국의 주목을 받았으며 탄압의 대상이었다. ‘사회과학서점 운동’으로 부른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1980년대 대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책방이 있다. 이해찬 전 총리가 1978년 신림동 서울대 앞에 연 ‘광장서적’이다. 광장서적은 사회과학서점 운동의 ‘발상지’다. 사회 모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쓰여진 책을 팔면서 생활문제도 해결하자는 게 서점 운영의 목적이었다. 이곳에서 재야운동권의 투쟁기획도 했다. 민주화운동 ‘동지’들에게 활동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광장서점은 1990년대 고시 등 각종 시험서적 등을 파는 종합 서점으로 바뀌었다. 광장서점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이 전 총리는 그 이름을 딴 정치연구소인 재단법인 ‘광장’을 2007년 만들었다.

김문수 경기지사도 서울대에서 멀지 않은 봉천 4거리에 ‘대학서점’을 냄으로써 사회과학서점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대학서점’은 노동·학생운동 전문 서점이었다. 그가 운동전문 서점에 착안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19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그는 노조위원장으로 일하던 회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신군부는 그를 삼청교육대에서 교육을 받아야 할 ‘사회정화 대상자’로 지목했지만 운이 좋아 삼청교육대에 잡혀 가진 않았다. 그의 후임 노조위원장 이기창씨는 회사의 고발로 삼청교육대를 다녀 왔다. 빡빡머리에 골병이 들어 풀려난 이기창씨와 함께 1981년 ‘대학서점’을 열었다. 해고된 노동자들의 생계에 보탬을 주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민주화 동지들에게 활동비 지원도
하지만 수배 중인 김 지사는 직접 서점운영을 하지 못했다. 김 지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김문수 에세이>에서 “돈벌이는 되지 않았다”면서 “삼청교육을 다녀왔거나 해고된 사람들이 오다가다 들락거리고, 이들 간의 연락처 정도의 역할은 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대학서점’은 김 지사가 정치에 입문할 때까지 15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김부겸 의원도 1987년 서울대 앞 신림4거리에 ‘백두서점’을 차렸다. 백두서점은 윤승용 전 국방홍보원장이 운영하던 오월서점을 무상으로 넘겨받아 이름을 바꾼 것이다. 경찰에 쫓겨다니는 신세였던 김 의원도 서점 운영을 부인 이유미씨에게 맡겨야 했다. 김 의원은 “사회과학서적에 대한 일제 단속이 있을 때마다 이 전 총리·김 지사의 형수, 그리고 나의 아내가 관악경찰서에 잡혀갔다”면서 “한 사나흘 뒤에 이 전 총리가 관악경찰서를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면 풀려나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유미씨는 둘째딸을 임신했을 때 사흘 동안 경찰서 철창 속에서 구류를 살기도 했다. 김 의원은 “돈벌이는 안 됐지만 운동권들의 연락소이자 쉼터로 톡톡히 기여했다”면서 “백두서점 이름으로 외상술을 먹는 데모꾼들도 꽤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 의원이 백두서점을 운영하던 시점에 이치범 전 환경부 장관은 신림동에서 ‘전야’를 운영했다.전야는 훗날 ‘그날이 오면’에 ‘합병’됐다. ‘그날이 오면’은 아직 사회과학전문 서점으로 건재해 있다.

권위주의 시대 때 서울지검 공안부에 압수된 일명 ‘빨간책’으로 불렸던 ‘불온서적’들.

연세대 앞에선 ‘ 서림’이 가장 큰 명성을 날린 사회과학서점이다. 김영환 의원이 투자하고 우원식 전 의원이 경영을 맡았다. 이 서점은 한때 잘 나갔다.

우 전 의원은 “이웃 사회과학전문서점인 ‘오늘의 책’(강금실 전 법무장관의 전 남편인 김태경씨가 운영)의 규모가 ‘ 서림’보다 3배나 컸다”면서 “‘오늘의 책’에서 책을 고르고 ‘ 서림’에서 책을 사는 학생들이 많아 김태경씨가 ‘연대 텃세가 너무 심하다’고 넋두리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책이 많이 팔린 것은 연대 텃세 때문도, 위험한 일이 이익이 많이 남기 때문도 아니었다. 이익금의 일부를 민주화운동에 지원한 게 큰 호응을 얻은 결과였다. 당시 서림은 여러 지하 노동운동을 지원했다. 우 전 의원이 서점운영에 나선 것은 세 차례나 위장취업이 적발돼 여러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에 몸담는 게 더 큰 문제를 낳을 수 있었다.

대신 서점운영에 나섰다. 노동·학생운동의 연장인 셈이다. 우 전 의원은 불심검문을 피해 서점에 온 학생들을 적극 도왔다. 그들의 가방을 숨겨놓는 비밀창고가 서점 한쪽 구석에 있었다. 1년여 뒤에 경찰의 기습으로 인해 가방 100개 정도를 압수당한 일도 있다. 그 일로 인해 지명수배를 받았다. 자수한 끝에 불구속기소됐다.
　

검문 피해온 학생 가방 숨겨주기도
선병렬 전 의원은 대전에서 1982년부터 84년까지 3년 동안 ‘창의서점’을 운영했다. 5·18민주화운동으로 수감생활을 한 그는 감옥에서 많은 사회과학서적을 읽었다. 사회과학서적을 출판하던 사람들도 만났다. 그들의 권유로 서점을 운영하게 됐다. 선 전 의원은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불심검문에 걸린 학생들이 ‘불온서적’을 창의서점에서 샀다고 발설해서 여러 차례 구류를 살기도 했지만 당시엔 적지 않은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경찰은 “그런 서점 하지 말고, 사업다운 사업을 하라”고 충고를 했다. 선 의원은 “이런 책을 어디서나 파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그 당시 서점 영업이익은 꽤 짭짤했다고 한다. 선 전 의원은 “위험을 무릅쓰고 ‘불온서적’을 팔아 많은 이익을 본다고 해서 우리끼리 레디컬커머셜리즘(급진적 상업주의)이라고 말했다”며 웃었다.

조승수 의원은 1988년 울산에서 ‘신새벽서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체계적인 노동운동 입문을 도울 수 있는 공간과 자료를 제공하겠다는 게 서점을 연 이유다. ‘신새벽서점’은 다른 어느 서점보다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대기업이 산재한 울산이 1987년 노동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울산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강화된 탓이다. 1989년 현대중공업의 파업 상태에서 노동조합원이 집회를 위해 이동하던 중 회사 관리자들이 노동자에게 위해를 가한 ‘1·8 식칼 테러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조 의원은 “경찰이 테러사건에 대한 수사는 않고 노동자가 갖고 있던 책을 문제 삼아 나를 수배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조 의원은 물론 부인과 종업원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결국 조 의원이 구속된 상태에서 늘어난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1992년 서점은 문을 닫게 됐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