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전 YS 딸 낳았다 주장하는 이경선씨 “친자 인정하고 위자료 지급하라” 소송
![[조명]YS ‘금지된 사랑’ 법정으로](https://images.khan.co.kr/nm/644/a4-1.jpg)
40여 년 전 한때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금지된 사랑’을 했고 딸 가네코 가오리(金子香織·43)를 낳았다고 주장하는 이경선씨(71)가 김 전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천륜을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당당하게 가오리가 딸임을 인정하고 자신에겐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법정으로 달려간 것이다. YS에 대한 ‘과거사 규명’이 법정으로 옮겨지는 순간이다.
이씨는 서울중앙지법에 제출한 소장에서 “입으로는 딸임을 인정하면서도 친자확인이나 호적 입적을 요구하면 전혀 딴 사람이 되어 ‘언제 내가 딸로 인정했느냐’면서 남의 일처럼 냉랭했다”고 섭섭함을 표시한 뒤 “더 이상 친생자임을 부인한다면 법에 따라 DNA 유전자 감식을 통해서라도 가오리가 피고의 자식임을 입증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가족외 가족’임을 입증하겠다는 것이다.
YS측 “연민의 정을 느낀다”
이번에 제기된 소송에 대해 YS와 그 주변에선 전혀 언급을 않고 있다. 측근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거 가오리에 대한 YS의 공식적인 답변은 두 차례 있었다. 하나는 1992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때다. 1987년과 1992년 두 차례 대선운동 과정에서 ‘가오리의 존재’는 ‘흑색선전물’의 단골 메뉴였다.
1992년 ‘인사이드월드’라는 잡지에 흑색선전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 ‘YS의 딸이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됐다. YS측은 “사실무근이며 나를 음해하려는 무리의 공작”이라고 주장하고 이 기사를 쓴 ‘인사이드월드’ 발행인 손충무씨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손씨는 당시 구속됐다가 공소기각으로 풀려났다.
두 번째는 이경선씨가 올초 ‘LA선데이저널’과 한 인터뷰가 보도된 뒤다. 이 인터뷰 기사는 이씨와 YS의 만남, 딸의 출산과 성장, YS와 가오리의 두 차례 만남, YS로부터 생활비와 양육비 명목의 23억 원 수수 등 충격적인 사실을 담고 있었다. 이에 대해 당시 YS의 비서실장 역할을 했던 김기수씨는 “이경선씨의 일방적인 주장이다. 이씨가 원하는 것은 돈”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 “딸을 빙자해서 돈을 얻겠다는 칠십 노인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고 측은함을 표했다.
2000년에 이은 두번째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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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소송을 의뢰받은 변호사는 전 법무장관인 강금실씨와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지낸 양인석씨. 두 변호사는 2000년 1월 YS에게 ‘내용증명’을 보냈다. 요지는 ‘소송의뢰인인 가오리가 김 전 대통령의 혈육인 점을 송사를 통해 확인해달라’는 것. 1961년 이씨와 YS의 만남, 1962년 가오리를 출산한 과정, 이씨의 일본 생활 등이 담긴 서류, 가오리의 어릴 때 사진과 소송 위임장 사본도 첨부됐다. 강·양 변호사는 “법률적 판단에 앞서 쌍방의 합의로 해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그 취지를 먼저 알려드린다”고 밝혔다.
이번 소송 대리인인 용태영 변호사는 “강·양 변호사가 특별한 이유 없이 소장을 제출하지 않았고 이씨가 소송진행을 요구하자 ‘강 변호사로부터 다른 변호사를 찾아보라는 답변이 왔다’고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용 변호사는 “내용증명을 보낸 것은 YS에게 친자확인소송에 대비하라는 메시지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전직 대통령인 YS와 법정대결을 회피한 것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이번에 처음으로 소장이 제출된 것이다.
가오리의 YS친자 여부와 함께 위자료문제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위자료 30억 원을 청구할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 YS측근들의 말처럼 이경선씨가 돈을 목적으로 소송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될 만큼 엄청난 액수다. 이 소장에는 “원고는 그간 피고(YS)의 도움으로 사건 본인(가오리)을 양육하고 교육했으나 원고(이경선)는 이제까지 사건 본인을 돌보는 생활로 피고의 도움받은 돈은 모두 소비되고 원고 자신도 70세 고령으로 활동불능인 바 위자료 금 30억 원 중 일부금으로 우선 1억 원을 청구한다”고 적고 있다.
이경선씨는 이미 23억 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용 변호사는 “이씨가 김 전 대통령 측으로부터 5∼6차례에 걸쳐 23억 원을 현금으로 받았지만 다 소진됐다고 털어놓았다”고 인정했다. 용 변호사는 23억 원의 성격에 대해 “자진해서 주고받은 것”이라고 규정하고 “이번에 이씨의 여생을 위해서 위자료를 청구한 것”이라며 23억원과 위자료 소송은 별개라는 입장이다. 이씨는 용 변호사에게 “1961년 야당의원 시절 YS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면서 “이런 저런 것 따지지 않고 위자료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23억 원은 과연 가오리의 양육비과 생활비로 쓰인 것일까. 그렇지 않음을 이경선씨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이씨는 올초 ‘LA선데이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 재임기간에 13억 원, 퇴임 후 10억 원을 받았다”고 밝히고 “상도동에서 받은 돈 일부를 아들에게 준 것을 가오리가 못마땅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목돈으로 받았으면 작으마나 빌딩이라도 샀을 것”이라고 후회하기도 했다. 이씨는 23억 원 중 7억 원은 일본에서 자신의 빚을 갚는 데 썼고 5억 원은 아들의 사업에 지원했고 나머지는 4년여 동안의 생활비로 썼다고 밝힌 일이 있다.
‘주인공’은 친자확인에 부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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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가오리가 친자확인소송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이 소송의 법적 성격은 위자료 소송이다. 용태영 변호사는 “재판이 진행되면 친자확인소송으로 전환이 가능하다”면서 “설(說)에서 시작해서 설로 떠돌던 YS 친자에 대한 확인 절차가 시작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이번 소송의 의미를 부여했다. 이경선씨는 또 경향신문을 비롯한 7개 일간지에 다음과 같은 사과 광고 게재를 요청했다.
“본인 김영삼은 1961년부터 사귀던 원고 이경선과의 사이에 1962. 11. 12. 딸 가네코 가오리를 낳았으나 혼외의 자로 딸을 낳았다는 것이 발각되면 꿈에도 버리지 못한 대통령 당선의 포부가 깨질 것 같아… 〈중략〉 …본인은 43년간 그들 모녀를 유기하고 또 혼인 못하도록 43년간 방기한 비정의 죄인임을 자인하옵고 백번 죽어 마땅하오나 이에 심심히 원고 모녀와 국민여러분 앞에 백배 사죄 드리는 바입니다. 사죄인 가오리의 부 김영삼 올림”.
소송 맡은 용태영 변호사 ‘이마로 도끼를 깐’ 법조계의 기인 “지난 8월에 한 여인이 나를 찾아왔지. 이씨였어. 그의 첫 마디가 뭔 줄 알아. ‘(YS 친자 소송) 소장을 낼 수 있느냐’는 것이었어. 여기저기 변호사를 찾아다녔지만 어느 누구도 소송을 맡지 않더라는 거야. 그 한마디가 변호사를 평생의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수치였어. 변호사의 소임을 나 혼자라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지.” ![]() ‘살아 있는 권력’과 혈투를 벌인 것이 이번만은 아니다. 1973년 3월, 서슬이 퍼렀던 박정희 정권과 한판 승부를 벌였다. 정부를 상대로 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해달라는 ‘석탄일 공휴권 확인청구소송’(행정소송-2심제)을 서울고법에 냈다. 당시 법조계에서는 “그것이 무슨 소송거리가 되냐”고 핀잔을 주었다. 고법 판사들도 “소송 요건이 안된다”며 각하하려는 분위기였다. 용 변호사는 ‘물귀신 작전’을 썼다. 그는 “그러면 국교(國敎)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서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하는 근거는 무엇이냐”며 크리스마스를 공휴일에서 제외하라는 소송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뒤에는 정부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두려워 한동안 전화를 받지 못한 채 피해다녔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승부는 싱겁게 끝났다. 당시 심흥선 총무처장관이 그해 11월 18일 국회보고에서 “불교계가 청구하고 있는 사월초파일의 공휴일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는 또 유신철폐를 처음으로 주장한 변호사였다.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서 날 죽이려 했지만 정보부와 기무사(기무사는 불교계 신망을 얻고 있는 용 변호사를 해쳐서는 안된다는 입장)의 싸움으로 남산 정보부 분실에서 불과 13시간 동안 조사받고 나온 일도 있지.” ‘법조계의 전설’로 불리는 용 변호사는 회고록 집필 작업을 계속해 2000년까지 전 7권으로 된 ‘최장(最長)’의 회고록을 완간했다. 7권의 책을 합치면 모두 5106쪽이나 된다. 그는 또 회고록에 빠진 이야기를 모아 8번째 자서전, ‘비망록’을 조만간 낼 예정이다. 이미 탈고는 끝낸 상태다. 용 변호사는 “기네스북감이지”라면서도 “길가에 이름 없이 피어 사람과 짐승에게 짓밟히고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노방초‘가 나의 삶과 비슷해 회고록 제목을 ‘황야의 노방초‘로 지었다”며 웃었다. |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