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는 죽어서 전설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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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조폭거물 쉬하이칭 장례식, 아시아 각국 두목들 신변노출 무릅쓰고 참석

[월드리포트]‘대부’는 죽어서 전설을 남긴다

지난 5월 29일 오후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서는 많은 사람을 긴장시킨 보기 드문 장례 행렬이 연출됐다. 검은 옷을 차려 입은 1만 명에 달하는 조직폭력배들이 흰색 영구차와 대규모 악단을 앞세우고 도심 장례식장에서 타이베이 근교 진바오산(金寶山) 공원묘지까지 무려 10㎞를 가두행진한 것이다.

장례행진 동안 수백 명의 경찰이 주요 구간마다 경계를 섰고, 이들 중 일부는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두목급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날 대만계 조폭뿐 아니라 홍콩의 삼합회(트리아드), 일본의 야쿠자 등 아시아 각국의 거물급을 한 자리에 모은 주인공은 최근 사망한 대만 조폭계의 대부 쉬하이칭(許海淸)이었다.

현지 ‘타이베이 타임스’는 이튿날 “반세기 동안 대만 조폭계의 대부로 군림했던 쉬하이칭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수많은 조폭 두목들이 얼굴이 공개되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다”고 보도했다.

쉬하이칭은 누구? 오랜 투병 끝에 최근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쉬하이칭은 158㎝의 키에 몸무게 35㎏밖에 안 되는 왜소한 체구였지만 대만 주먹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거물이었다.

1913년 대만에서 출생한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었고,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10대 초반 일찌감치 주먹계에 발을 담갔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타이베이 번화가인 완화(萬華) 거리를 근거로 명성을 떨쳤고, 주먹솜씨와 탁월한 조직관리 능력으로 일찌감치 두목자리에 올랐다.

장제스(蔣介石)가 이끌던 국민당이 1940년대 중국 공산당에 패주해 대륙에서 대만으로 넘어올 무렵 그는 이미 대만의 조직폭력배 1세대로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쉬하이칭은 대만 정계에 첫 진출한 조폭 두목으로도 유명하다. 37세 때인 1950년 집권 국민당의 추천을 받아 타이베이 시의원을 역임했다. 의원 임기는 단 한 차례에 그쳤지만 사람들의 지탄을 받거나, 당에서 축출된 것이 아니라 적성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스스로 정계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정계 진출 이전 그는 이미 단순한 조폭 두목이 아니라 호텔, 나이트클럽, 농산물 수출업체 등 수십 개 사업체를 거느린 경제계 실력자였다. 1950년대 그는 홍콩 삼합회의 일파인 ‘14K’의 제1인자가 됐으며 이후 수십 년간 대만뿐 아니라 마카오 등지까지 수많은 도박장과 술집을 운영하며 연예계에도 입김을 행사했다. ‘타이완 뉴스’에 따르면 그는 당시 완화거리를 중심으로 빌딩만도 20~30개를 소유했을 정도의 막강한 재력가로 통했다.

쉬하이칭은 70년대 주먹계를 은퇴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대만 조폭계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각 파벌의 분쟁 때마다 중재자 역할을 하며 제왕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모기 형님(蚊哥, 원거)’이라는 별명은 작은 체구에도 불구, 뒷골목을 주름잡았던 젊은 시절의 날렵한 주먹솜씨에서, ‘위대한 중재자’라는 별명은 상대 조폭조차 존경할 정도의 뛰어난 분쟁 해결능력을 발휘한 데서 비롯됐다.

쉬하이칭과 30년간 관계를 맺은 일본 최대 야쿠자조직 스미요시파의 두목 노구치 마쓰오(野口松男)는 장례식에 참석해 “원거의 외모는 아주 왜소하지만, 마음이 열린 사람이었다”며 “그는 대만의 대부 중 한 명이었다”고 그를 추모했다.

‘타이베이 뉴스’는 상대 폭력조직의 공격을 염려한 노구치 마쓰오가 장례식에 참석해서도 30명이 넘는 경호원들의 밀착경호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스미요시파는 조직원만 200만 명에 달하고, 이들 중 상당수는 대만 남부 타이난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막강한 대만 조폭 대만 조폭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연예계는 물론 정치권과도 깊은 연관은 맺고 있어 경찰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특히 대만 연예계는 조폭들의 입김 아래 있다는 게 정설이다. 많은 배우들이 조폭의 강압에 못이겨 저질 영화에 출연하고 아예 조폭과 결탁해 생존을 모색하기도 한다. 중화권 최고의 코미디 배우로 알려진 저우싱츠(周星馳)는 조폭과의 관계를 의심받아 캐나다 이민이 좌절됐다. 캐나다 연방최고법원이 저우싱츠와 조폭의 연관성을 방증하는 서류 200여 장을 증거로 채택한 결과였다.

지난 연말에는 대만 제1의 수배범이었다 체포돼 옥살이를 했던 조폭 두목 양솽우(楊雙五)가 출감한 지 단 석 달 만에 가오슝에서 경찰의 경비 속에 결혼식을 열었다. 대만 언론은 그의 결혼식에 2600명에 달하는 대규모 하객이 참석했으며 양과 친분있는 대만 조폭 거물, 일본 야쿠자, 연예인들이 대거 눈에 띄었다고 전했다.

대만의 유명 MC인 우쭝셴(吳宗憲)은 조직폭력배 두목의 여자에게 보복을 당해 화제가 됐다. 지난 4월 18일 새벽 한 찻집을 들어가다 한 여성과 몸이 부딪쳐 “왜 쳐다보냐”며 시비가 붙었다가 폭력배 7~8명에게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았다. 언론은 처음 조폭 두목의 여자와 눈이 맞아 폭행당했을 거라고 추측했지만 나중에 경찰조사 결과 대만 최대 폭력조직 주롄방(竹聯幇) 보스의 여자를 우습게 봤다가 봉변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쉬하이칭 장례식에도 타이베이연예협회장인 양광유(楊光友)와 영화배우이자 가수로도 유명한 유티엔(余天), 류후추(劉福助) 등이 대거 참석했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지난해 4월에는 여성들로 구성된 대만 조폭 호봉대(虎鳳隊) 두목 가오메이팡(高美芳)이 타이베이 시내 총통부 앞 폭력시위에 개입, 대만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조직 세계에서 왕란(王蘭)으로 불리는 그녀는 주롄방 산하 여성 별동대인 호봉대를 이끌며 일명 ‘조폭마누라’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왕란은 총통선거에서 야당연합의 친민당 쑹추위(宋楚瑜) 주석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선거 이후에도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 동정표를 따기 위해 유세 중 피격사건을 조장했다며 진상규명 촉구 시위를 벌였다.

지난 5월 29일 쉬하이칭 장례식의 사회를 맡았던 타이베이 시의회 우이비추(吳碧珠) 의장은 쉬하이칭이 한때 시의회 의원이었던 점을 상기시키며 고인을 존경한다고 말해 외신기자 등 많은 이들의 구설수에 올랐다.

<국제부/이상연 기자 lsy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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