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우이 부총리, 일본 총리 회담 취소 배짱외교로 대륙자존심 지켜
![[월드리포트]‘작은 여걸’이 더 맵다](https://images.khan.co.kr/nm/627/e5.jpg)
지난해 4월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여성 100인을 발표했다. 첫째 자리는 당시 미 국가안보보좌관이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차지했지만, 두번째 인물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동양여성이었다. 바로 우이(吳儀·67) 중국 국무원 부총리다.
우이 부총리는 그 무렵 시사주간 ‘타임’지가 꼽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100인에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사스(SARS, 급성호흡기증후군)로 수십 명이 사망한 뒤 해결사로 등장해 피해를 은폐한 베이징 시장을 경질하고 모든 방역 정보를 공개한 리더십을 높이 산 결과였다.
그런 우이 부총리가 최근 일본 방문 중 두둑한 배짱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와 약속한 회담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일방적으로 회담을 취소한 뒤 중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외교의전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결례였지만 오히려 과단성 있게 밀어붙이는 면모를 보여줬다는 후한 평가가 뒤를 잇고 있다. 심지어 일부 중국인들은 “과거사를 진정으로 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했다”며 영웅시하는 분위기다.
대중의 인기 높은 ‘중국의 대처’
언론 보도에 따르면 5월 17일 일본에 도착한 우 부총리는 고이즈미 총리가 바로 전날 국회에서 “전몰자 추도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는 다른 나라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발언했다는 소식을 듣고 강력히 반발했다고 한다. 회담시에 “같은 말을 듣는 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이유였다.
우 부총리는 중국 지도부에 회담거부 의사를 밝혔고, 지도부로부터 동의한다는 회신을 받자마자 즉각 행동으로 옮겼다. 당황한 일본 정부는 귀국에 앞서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전직 외교관인 재미동포 천유웨이는 “만일 우이 부총리가 고이즈미 총리와 면담을 진행했다면 중국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꼴밖에 안 됐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했고 베이징대 국제관계대학 예쯔청 학장도 “이번 행동은 일본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있는 중국 지도부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여성들은 대부분 직업이 있다. 그러나 전문직 여성은 그다지 많지 않다. 더구나 정치분야는 ‘여성 불모지’나 다름 없다. 그런 정치분야에서 우이는 일찌감치 ‘중국의 대처’ ‘철낭자(鐵娘子)’로 불리며 지도부의 신뢰와 대중의 인기를 함께 누렸다.
그녀의 개인적 성장사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1938년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에서 태어난 우 부총리는 5척 단구에 수수한 여인이다. 1962년 베이징석유학원 석유정제과에서 학업을 마친 뒤 란저우 석유공장의 평범한 기술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6년간 석유업계 고급 공정사로 연구사업 분야에 종사하던 그녀가 정치에 발을 담근 것은 능력을 인정받아 베이징 부시장이 되면서부터였다. 그녀의 오늘은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다. 베이징 부시장 시절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놓고 1년 이상 집에 들어가지 않은 일화는 유명하다.
그녀를 일순간에 중국 정계의 여걸로 만든 사건은 1990년대 미국 무역대표부(USTR) 칼라 힐스 대표와의 담판이었다. 당시 ‘미국의 여걸’이던 힐스가 중국 내 불법복제 문제를 물고 늘어지며 ‘좀도둑’이라고 표현하자 우이는 “미국은 과거 중국의 유물을 강탈해간 ‘날강도’ 아니냐”며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런 배짱은 장쩌민(江澤民)이나 주룽지(朱鎔基) 등 중국 최고수뇌부의 애정어린 지원을 이끌어냈다. 엄격하기로 유명한 주룽지 전 총리마저 그녀를 질책한 적이 없다고 한다.
‘중국의 10대 여성’ 1위에 선정
우이는 1998년 전인대에서 주룽지 전 총리의 천거로 대외경제무역합작부장으로 선출되며 고속승진하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2010년 상하이 세계박람회유치 등에 결정적 역활을 했고 2003년 사스 파문이 일자 총대를 메고 나섰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그녀를 사스예방퇴치지휘부 총지휘자로 임명한 뒤 사스 사태로 추락한 중국의 국가 이미지까지 되살리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녀는 며칠씩 잠들지 못해 수면제를 복용할 만큼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중국 인터넷에는 ‘우이가 맡은 뒤로 전염병이 없어졌다’는 ‘민요’가 유행할 정도였다. 우 부총리는 결국 ‘사스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마쳤고 중국인들에게 여걸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이후 2003년 11월 중국 공산당 대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올랐고, 2004년에는 중국 여성 최초로 부총리 반열에 등극했다.
독신인 우 부총리는 과거 쑨원(孫文)의 부인 쑹칭링(宋慶齡), 마오쩌둥(毛澤東) 부인 장칭(江靑), 저우언라이(周恩來) 부인 덩잉차오(鄧潁超) 등 현대 중국의 여걸들과 달리 실력자 남편의 후광 없이 당당하게 ‘홀로서기’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는 금테 안경 뒤에 갈무리된 날카로운 눈빛과 조리있는 말솜씨, 똑부러지는 일처리뿐 아니라 대단한 친화력을 지녔다. 칠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자신에 대해 “독신주의자는 아니다. 내 삶에 끼어들 사람이 없었을 뿐이다”라며 결혼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입심도 있다. 노래와 낚시, 골프, 볼링, 테니스 등 스포츠에도 만능이다.
이런 덕분에 2002년에는 중국 전국부녀연합회가 뽑은 ‘중국의 10대 여성’에 탁구 세계챔피언 덩야핑(鄧亞萍)을 제치고 1위에 뽑혀 높은 대중적 인기를 과시했다.
물론 일부에서는 그녀의 능력에 다소 ‘거품’이 끼었다는 버블론도 제기하고 있다. 미 경제잡지 ‘비즈니스 위크’는 지난해 베이징대 대학원생의 발언을 인용, “중국의 WTO 가입시 우이가 지나치게 많은 양보를 했고 농업분야 협상도 매우 서툴렀다”는 평가를 게재했다. 일부 인사들은 우이가 농촌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이공계 ‘먹물’이라는 지적도 한다.
<국제부/이상연 기자 lsy77@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