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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과제… 개혁적 요구 수용 여부 관심

제 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탄생은 말 그대로 ‘우르비 엣 오르비(로마와 세계, 경향 각지라는 의미의 라틴어)’에 기쁨과 놀라움, 아쉬움, 탄식을 동시에 전해준 뉴스였다. 당초 교황 선출을 위한 이번 추기경단 비밀회의(콘클라베)에서는 보수와 개혁, 유럽과 제3세계의 힘겨루기가 치열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콘클라베에 참석한 추기경 115명은 투표를 시작한 지 단 이틀 만인 4월 19일 요제프 라칭거를 새로운 바티칸의 수장으로 선택했다.

영국 BBC방송은 무엇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적통 후계자를 찾은 것으로 분석했다. 바티칸과 전세계 가톨릭의 역학구도를 잘 알고, 전임 교황이 걸어온 정통 노선을 견지할 수 있는 ‘준비된 교황’을 지목했다는 것이다.

같은 이념, 다른 개성 지난 4월 8일 교황 장례식 미사를 집전했던 라칭거는 바오로 2세의 절친한 친구이며 동반자였다. 두 사람은 1977년 바티칸 주교 회의에서 처음 인연을 맺었고, 4년 뒤인 1981년 교황이 된 바오로 2세가 라칭거 추기경을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에 발탁하면서 20여년을 바티칸 지붕 아래 함께 했다.

중세 종교재판을 주관했던 신앙교리성 장관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라칭거는 바오로 2세의 보수적 이념을 함께 구축하고 지켜왔다. 여성사제 임명, 피임, 낙태, 동성애, 해방신학 같은 주요 현안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는 같았으며 그 둘 사이를 가르려는 노력은 무의미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념적 지형은 비슷해도, 두 교황의 색깔과 개성은 상당히 다르다. 독일 신학계에서 뛰어난 신학자로 명성을 떨친 라칭거는 전임 요한 바오로 2세와 달리 수줍음이 많고 은둔적이다. 재임 시절 130여 나라를 방문했을 만큼 정력적이던 요한 바오로 2세와 달리 베네딕토 16세는 한마디로 조용한 학자다.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베네딕토 16세에게 신학을 배운 몬시뇰(고위성직자) 노이하우스는 새 교황에 대해 “그의 초연함은 신화로 남아 있을 정도”라고 귀띔했다. 또 “학생들의 어깨에 손을 얹는 그런 (다정다감한) 교수는 아니었다”는 게 제자였던 시그프리트 비덴호퍼 프랑크푸르트대 교수의 기억이다.

새 교황은 일에 묻혀 살고 취미래야 짬이 날 때 친구들과 교황청 인근 바이에른식 식당에 들러 고향 음식을 즐기며 담소하는 정도다. 동료인 오스트리아의 크리스토프 쇤보른 추기경은 교황에 대해 “내향적이며 내면의 움직임을 작은 신호로 드러낼 만큼 섬세하다”고 평했다.

1951년 6월 29일 나란히 사제 서품을 받았던 친형 게오르크 라칭거 신부(81)조차 “동생이 새 교황으로 선출됐다는 소식에 기쁨보다는 흥분과 우려가 앞선다”고 말했을 정도다. 고령(78세)도 고령이지만 성품이 외향적이지 않아 교황으로서 받아야 할 막중한 스트레스를 견딜는지 걱정된다는 의미다.

산적한 과제 ‘USA투데이’는 새 교황은 과거 어느때보다 불안정한 세계를 영적으로 이끌고 통합할 책무를 지고 있다며 종교간 대화는 물론, 냉전체제 와해 이후 가속화하는 국지적 갈등에도 따뜻한 시선을 보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베네딕토 16세도 4월 20일 추기경들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된 교황 선출 축하미사에서 교계의 통합과 타종교와의 대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나의 첫째 임무는 세계 가톨릭의 재통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른 교회나 종교 단체들과 진지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선언에도 불구, 과거 독일 가톨릭과 루터교 간의 화해 노력을 저지한 그의 전력 등을 들어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이가 적지 않다. 영국 시사지 ‘이코노미스트’는 한발 더 나아가 “전쟁과 가난보다 신을 외면하는 인간의 잘못이 가장 큰 문제”라던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을 거론하며 새 교황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11억 가톨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한 아프리카와 남미 등 제3세계가 ‘세계화의 덫’에 걸려 궁핍에 신음하고 내전으로 고통받는 상황에 대해 어떤 ‘대답’을 내놓겠느냐는 질문이다.

베네딕토 16세의 과제는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2000년 동안 교회의 중심이었던 유럽에서는 해마다 신도들이 이탈하고 있다. 바오로 2세가 ‘물신주의 제국’으로 질타했던 미국에서는 사제 지원자가 줄어 일요 미사를 드리지 못하는 교회가 속출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에이즈 사망자를 줄이기 위해 교황이 콘돔 사용을 용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새 교황이 해방신학이나 종교적 다원주의, 개신교와의 합동 예배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성직자 결혼이나 여성 사제 허용과 같은 개혁 목소리를 담아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베네딕토 16세는 추기경이던 1980년대 남미의 자생적 해방신학에 대해 “예수의 본래 가르침에서 벗어난 이종신학”이라고 일갈했고, 동성애와 여성 사제 서품에 대해서는 “도덕적인 죄악을 좇는 본능적 성향” “교회가 여성을 사제로 서품할 권리가 없다”는 의견을 고수했다.

작년말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에는 낙태 권리를 지지하는 정치인들(pro-choice politicians)에게 성찬 의식을 베풀지 말라고 요구해 구설수에 올랐고, 이슬람 국가인 터키를 유럽연합(EU)에 가입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해 정치적인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해방신학 계통의 루벤 드리 부에노스아이레스대 교수나 콜롬비아 종교연구소 파비안 사나브리라 소장이 이번 콘클라베를 “교조적 자본주의 우파의 승리” “최악의 선택”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희망을 저버린 선택”이라고 강력 비난한 까닭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제부/이상연기자 lsy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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