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실 ‘슬픈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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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은 왕족의 결혼… 세기의 로맨스보다 정략적 결합

두 사람이 마침내 결혼했다.
무려 35년 동안 ‘불행했던 연인’ 찰스 영국 왕세자(56)와 커밀라 파커볼스(57)가 4월 9일 오후 2시 30분(현지시각) 결혼 축복 예배를 위해 런던 서부 윈저성 제단 앞에 꿇어앉았다. 생전에 “우리 결혼엔 늘 세사람이 부대꼈다”고 슬픔을 토로해 수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또 한명의 주인공 고(故) 다이애나비가 빠진 그들만의 온전한 결합이었다.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 최신호(18일자)는 특집기사에서 지난 수세기 동안 영국 왕실의 스캔들을 소개하며, 많은 경우 왕실의 결혼이란 권력과 재물의 물물거래였을 뿐 흔히 말하는 사랑의 완성은 아니었다고 전했다.

[월드리포트]영국 왕실  ‘슬픈 연가’

조지 4세와 캐롤라인 18세기 후반 조지 4세와 독일 중부 브런즈윅 캐롤라인 공주의 만남은 오늘날 타블로이드 기사를 무색케 할 정도였다. 찰스 왕세자처럼 웨일즈 공작이었던 조지 4세는 난잡한 성생활과 폭음, 노름벽까지 ‘겸비’한 바람둥이였다. 결국 엄청난 노름빚에 쫓기던 32살 때인 1795년 왕실과 의회로부터 황당한 제안을 받는다. 사촌인 캐롤라인 공주와 결혼하면 의회가 빚을 탕감해 주겠다는 것. 왕자는 당시 마리아 피츠허버트라는 가톨릭 세례명의 연상녀와 비밀·불법 결혼생활 중이었지만, 키가 작고 땅딸막한 캐롤라인의 남편이 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 상대방을 싫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지 4세는 장래의 신부감은 처음 만난 뒤 시종 해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음이 괴롭군 해리, 브랜디 한 잔 가져다 주게.” 3일 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만취한 그는 딸꾹질을 하며 결혼식장에 들어섰고 캐롤라인에 따르면 “쇠창살 아래 그는(조지 4세) 쓰러지고 나는(캐롤라인) 그 사람을 내버려둔 채” 첫날밤을 보냈다. 조지 4세와 잠자리를 꺼린 캐롤라인은 심지어 몸을 씻지 않고 속옷조차 빨아 입지 않았다고 한다.

헨리 8세와 앤 볼린 역대 영국 왕 가운데 결혼문제에 있어 가장 우여곡절을 겪은 이는 헨리 8세였다. 그는 형이 요절하자 당시 관습대로 18세의 어린 나이에 형수인 왕비 캐서린과 결혼했다. 아라곤 출신인 캐서린과의 결합은 스페인을 외교적으로 묶어두기 위한 ‘정략의 끈’이었다. 하지만 캐서린의 미모가 시들고 둘 사이에 후세를 이을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결혼생활은 20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헨리 8세는 캐서린을 내쫓고 매혹적인 귀족 앤 볼린을 새 왕비로 맞았다. 그리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 로마 교황과 단절한 뒤 1534년 수장령(首長令)으로 영국 국교회를 설립해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안타깝게도 볼린도 왕에게 아들을 안겨 주지는 못했다. 왕비로 지낸 지 1000일 만에 볼린은 간통혐의로 기소돼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것이 후세에 ‘1000일의 앤’으로 불린 연유다. 볼린을 처형한 바로 그날 밤 헨리 8세는 제인 세이모어라는 여인과 약혼했고 열흘 뒤 새 아내로 맞았다. 세이모어가 훗날의 에드워드 6세를 낳다가 사망하자 그는 클레브 영지의 안네 등 도합 5명의 왕비를 차례로 갈아치웠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 드물지만 ‘장미의 전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840년 색스코버그 고터 가(家)의 사촌 앨버트 공과 결혼한 빅토리아 여왕은 정반대 케이스다. 여왕의 나이 19세에 전격적으로 맺어진 두 사람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에서 연을 맺었지만 앨버트 공의 성실한 외조, 남편에 대한 빅토리아 여왕의 뜨거운 애정으로 유럽 왕실사에 남는 잉꼬부부가 됐다. 슬하에 무려 9명의 자식을 두었고 이 자식들은 벨기에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유럽 왕가와 얽히고 설킨 사돈관계를 맺었다. 1861년 남편 앨버트 공이 42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여왕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수년간 모든 국사에서 손을 떼고 버킹엄 궁전에 은둔했다.

영국 왕실의 권력과 영광이 스러진 20세기에도 순애보는 있었다. 미국인 이혼녀 월리스 심슨과 결혼하기 위해 왕관을 포기한 에드워드 8세다. 사실 첫번째 아내를 버리고 앤 볼린과 결혼한 헨리 8세 ‘덕분’에 왕이 이혼녀와 결혼한다고 해서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국가와 왕실의 위신이 더 큰 장애물이었다.

공공연한 왕실의 연인들 찰스 2세와 넬 그윈, 에드워드 7세와 앨리스 케펠, 그리고 앨리스 케펠의 증손녀인 커밀라 파커볼스와 찰스 왕세자…. 바로 영국 왕실사에 이어져 온 정략결혼의 희생양, 비극의 연인들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들 사이에서는 사생아가 태어났다. 에드워드 7세의 임종 순간, 아내였던 알렉산드라 왕비가 남편의 오랜 애인 케펠을 침실로 불러들여 마지막을 함께 하도록 배려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항상 이런 식이었습니다. 아주 최근까지 그랬죠, 아무도 단 한순간도 이런 관행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버드대 해리 겔버 교수는 말했다.

안나 크라크 미국 미네소타대 역사학과 교수는 오늘날까지 백마를 타고 나타나는 잘생긴 왕자님과 동화같이 로맨틱한 왕실 결혼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지만 역사는 이같은 동화가 사실과 동떨어져 있음을 웅변한다고 지적했다. 전통적으로 영국 왕가의 결혼은 혈통의 순수성과 정략적 연맹을 공고히 하기 위한 근친혼과 정략적 결합에 가까웠다는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찰스와 커밀라의 35년간 지속된 사랑이야말로 동화 속 러브스토리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정략결혼의 전통과 사람들의 손가락질, 수많은 소문과 험담, 가슴아픈 상처 그리고 왕위 승계와 공식적인 왕비 자리마저 잃어버릴 위험 속에 50대에 하나가 됐기 때문이다.
평민 여성과 결혼한 그리스의 마이클 왕자는 2003년 잡지 ‘베니티 페어’에 이런 글을 남겼다. “자국 왕자가 평민, 그것도 외모와 인생여정마저 평범한 여자를 신부로 선택한다면, 보통사람들은 언젠가 왜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들을 왕족으로 인정해야 하느냐고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결국 신데렐라 이야기를 좋아하는 보통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도 평범한 외모와 그저그런 신분의 누군가가 어느 한순간 왕족으로 격상되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심리가 잠재해 있다는 말이다.

<국제부/이상연기자 lsy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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