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전총리 하리리 암살 후폭풍… 시리아-이스라엘 배후조정 의혹
‘중동의 화약고’ 레바논이 뜨겁다. 10여년간의 불안한 평화가 지난 2월 14일 라피크 하리리 전총리가 폭탄테러로 암살되면서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레바논 혼란의 불똥이 이웃나라에 튈 경우 생긴다. 팔레스타인과 어렵사리 평화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이스라엘, 테러지원 혐의로 미국 부시정권에 의해 ‘불량국가’ 낙인이 찍힌 시리아 등 레바논은 중동정세를 뒤흔들 수 있는 불안한 이웃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다.
레바논과 시리아 누가 ‘미스터 레바논’으로 불렸던 정치거물 하리리를 죽였을까. 현장조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미국과 국제사회의 화살은 시리아를 향했고,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시위도 시리아 규탄 일색이다. 요구는 한 목소리다. 레바논에 주둔 중인 1만4000명 시리아군을 철수시키라는 것이다. 안팎의 압력을 못이긴 시리아는 2월 24일 부분적인 재배치를 선언했지만 이전에도 비슷한 선언을 하고 이행하지 않은 적이 많아 실제 이뤄질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전략적 이유 때문이다.
시리아가 레바논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1976년. 레바논 내전(1975~1990년) 당시였다. 소수 기독교인을 보호한다는 이유에서 군대를 파견했지만 실제 속셈은 레바논 진주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1967년 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국가들을 완패시킨 이스라엘을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치권을 장악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레바논의 주요선거마다 시리아는 입김을 불며 현 에밀 라후드 대통령과 같은 친(親)시리아계 인사와 정당이 권력을 장악하도록 만들며 사실상 속국(屬國)으로 삼았다.
암살된 하리리 전총리는 시리아의 지나친 간섭에 항의해 지난해 10월 총리직을 사임한데다, 최근 반(反)시리아계 야당진영에 목소리를 보태며 레바논 독립에 힘을 싣던 중 변을 당해 시리아의 혐의는 짙기만 하다.
일부 전문가들은 시리아가 이번 테러로 얻을 것이 전혀 없다며 배후 가능성을 부정하기도 한다. 시리아는 2000년 이스라엘이 남부에서 철군한 이후에도 레바논에서 물러가지 않아 유엔안보리 결의 1559호 등 국제사회 비난의 타깃이 돼왔다. 매를 따로 부를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의심하는 분석가도 있다. 역내 주요 적대국가인 시리아의 정치-외교적 입지를 위축시키고 레바논에서 영향력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메가톤급 테러공격을 배후 조종했다는 것이다. 이슬람 무장단체라는 설도 있다.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레바논 내부의 정치세력간 갈등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누가 실제 범인이건 간에 이번 사건이 레바논의 독립의지에 불을 당긴 점만큼은 확실하다. 야당이 주도하는 시위에 '독립봉기'를 상징하는 붉은 색과 흰색 스카프를 맨 채 자발적으로 참여한 수천명의 시민들은 "유혈과 재난은 끝나야 한다. 레바논은 시리아로부터 자치권한을 되찾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레바논의 구도 시리아는 압력에 못이겨 레바논 내 자국군 재배치를 선언하며 "군대를 철수하면 레바논의 안정을 보장할 수 없다”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중동지역에서 가장 복잡하고 분열된 나라’인 레바논의 다양성을 빗댄 것이다.
레바논의 국민구성은 중동의 교파-종파 전시장으로 불릴 만하다. 이슬람 시아파-수니파-드루즈파-알라위파, 기독교 마론파, 그리스정교 등이 뒤섞여 있다. 베이루트 내전을 취재했던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저서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에서 “서로 미워하는 이들의 공통점이라곤 이스라엘을 미워한다는 것”이라고 복잡한 갈등을 요약한 바 있다. 내전이 발발한 것도 기독교 우파인 팔랑헤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게릴라를 습격하자 모슬렘이 이에 대응하면서였다.
그렇다면 ‘공공의 적’ 시리아가 사라진 레바논은 다시 이같은 분열상으로 되돌아갈까. 아직까지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갈등 가능성은 수면 바로 아래 잠복해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레바논 분열상이 재연될 경우 이스라엘까지 개입될 가능성을 지적한다.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게릴라단체인 헤즈볼라는 최근까지도 이스라엘을 간헐적으로 공격해온데다 이스라엘은 지난해 베이루트 근교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관련 시설로 알려진 곳을 폭격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분쟁이 재연될 경우 지역전으로도 번질 수 있다는 우려는 여기서 나온다.
미국과 시리아 미국은 이참에 시리아에 대한 공세를 강화할 참이다. 아직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확실한 심증을 갖고 있어 시리아의 자국 대사를 소환하는 방법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미 행정부 내에서는 시리아에 대한 강력한 제재조치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여기에는 대(對) 시리아 투자제한 및 은행 제재, 안보리 회부 등도 꼽힌다.
이외에도 미국은 시리아가 이란의 지시에 따라 시아파 무장단체인 레바논 헤즈볼라 게릴라와 기타 이슬람 무장세력들의 이스라엘 공격을 부추긴 것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역내 시리아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것은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해서도 불가결하다는 판단이다.
이에 시리아는 최근 이란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며 미국에 대응하겠다고 발표해 중동에 긴장을 더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지는 한발 더 나아가 이것이 ‘상호방위조약’이라고 보도했다. 핵개발 의혹을 사고 있는 ‘악의 축’ 이란과 암살배후로 의심을 사는 시리아가 손을 잡는 셈인데, 실제로 어떤 형태가 될지는 아직까지 불분명하다. 미국에 대한 ‘견제구’로 그칠 가능성도 크다. 제재가 쉽지 않은 이란과 달리 경제구조가 취약한 시리아가 제재를 당하지 않도록 돕자는 의도다.
이전에도 시리아와 이란은 같은 배를 탄 적이 있다. 1980~88년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에 시리아는 아랍국가로서는 유일하게 페르시아계로 인종이 다른 이란을 지지했다. 당시 대통령이던 하페즈 알 아사드와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숙적관계였기 때문이다.
향후 문제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암살 현장 조사가 나와야 구체화될 듯하다. 시리아가 운좋게 혐의를 벗는다 해도 후폭풍은 쉽게 잦아들지 않을 것이다. 레바논으로서는 '내부소행'이란 결과가 아니기만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15년간 17만명이 사망했던 내전만큼은 되풀이할 수 없는 악몽이기 때문이다.
국제부/최민영기자 mi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