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서 구소련 시절 못지않은 암약... 미국 등 서방국가 대응 골머리
지난 1월 중순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이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서 한 아일랜드 사업가를 전격 체포했다. FBI 요원들은 이 남자를 쫓아 캘리포니아 서니베일의 전자제품 회사 2곳부터 마운틴뷰의 한 호텔, 산호세 교외 어느 골목 끝에 위치한 조용한 주택까지 1주일 동안이나 뒤를 캐고 있던 참이었다.
FBI가 법원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첨단기술 분야 전문가인 이 아일랜드인은 미 국방부가 '국방용품'으로 지정, 국외 유출을 금지하고 있는 최신 컴퓨터 부품들을 아일랜드를 거쳐 러시아로 밀반출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미 정부 관리들은 이번 사건이 최근 이라크 무장세력, 알 카에다 등 이슬람 테러리스트와 '전쟁'을 치르는 미국의 또다른 골칫거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바로 미 전역에서 암약하는 러시아 스파이 문제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최근 냉전이 끝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러시아 스파이 활동은 옛소련 시절에 비해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내 알려진 스파이도 100명 넘어
![[월드리포트]자나 깨나 '러시아 스파이' 조심](https://img.khan.co.kr/nm/ContentsObject/9/9154_1_e2_1.jpg)
불과 4년 전 조지 부시 대통령 행정부는 러시아 스파이 50명을 대거 추방했다. FBI 간부였던 로버트 한센이 21년간이나 러시아를 위해 간첩 노릇을 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직후 내려진 보복조치였다. 그러나 단 4년 만에 러시아 스파이들은 빠른 속도로 재침투해 2배 이상 '증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냉전 시절 옛소련을 상대로 한 첩보전에 관여했던 미국의 전직 고위 정보관리는 "러시아 스파이들은 돌아왔다"면서 "그들은 매우 바삐 활동하지만 과연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한 고위급회담에 참석한 미 정부 관리들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이미 FBI, CIA, 국방부 등을 상대로 러시아 스파이 문제에 대처할 것을 지시했다고 귀띔했다.
타임은 9-11 테러 이후 대(對) 테러 기관으로 거듭난 FBI가 방첩임무를 우선순위에서 젖혀둔 반면 냉전 시절 KGB를 진두지휘하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는 이 틈을 타 스파이 활동능력을 적극 확대해왔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출신자의 이민 규제를 크게 완화한 정책도 NOC 스파이의 수를 크게 늘리는 원인으로 지적된다.
관리들은 러시아 스파이들이 미군의 첨단기술과 장비, 최신 레이저 등과 같은 민간 및 군사 겸용 기술을 노리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최근 친미-친서방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는 그루지아, 우크라이나 같은 옛소련연방 국가와 중국, 중동 등과 관련한 미국의 외교정책 및 미국의 에너지정책에 관한 정보도 주요 첩보 대상이다. 이와 함께 러시아 등의 핵 억지력을 무력화할 목적으로 개발 중인 미국의 미사일 방위계획(MD)이 '타깃'이다. 러시아는 미국에 직접 스파이들을 침투시키기도 하지만 중국이나 파키스탄, 이란처럼 제3국에 본사를 둔 기업을 이용한다. 미국의 한 고위 관리는 "이런 기업들이 수천개는 될 것으로 보인다"고 털어놓았다. 바로 이번에 FBI에 꼬리를 잡힌 아일랜드 기업인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데이비드 스자디 FBI 방첩담당 국장보는 러시아 스파이들에 대응해 앞으로 5년간 스파이 추적요원들을 갑절로 늘리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FBI는 56개 실무부서마다 최소한 5명씩의 요원으로 구성되는 방첩대를 두고 있다.
한편 독일에서도 러시아 스파이가 냉전시대와 비슷한 규모인 약 130명에 이르며, 독일 각계에 대해 공격적으로 첩보활동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독일 시사주간지 '포쿠스'는 2월 7일자 기사에서 방첩기관인 헌법수호청과 연방범죄수사국(BKA)의 '신뢰할 만한 소식통의 분석'을 인용, 이같이 밝혔다.
포쿠스에 따르면 러시아측은 독일 정치권과 기업, 군, 연구기관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지극히 공격적인'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다. 헌법수호청의 한 고위 간부는 최근 러시아의 대독일 첩보활동이 크게 강화되고 있다면서 이는 옛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들의 신원과 이들이 독일에서 벌였던 많은 공작의 내용이 거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소련 시절에 동독 드레스덴에서 KGB 요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는 게 정설이다.
러시아 비밀요원 독일군 입대 발각
![[월드리포트]자나 깨나 '러시아 스파이' 조심](https://img.khan.co.kr/nm/ContentsObject/9/9154_2_e2_4.jpg)
포쿠스에 따르면 얼마 전 러시아 군 비밀정보기관인 GRU 소속 한 요원이 독일군 기밀서류를 빼내려 신분을 위장한 채 독일군에 입대하려다 들통났다. 독일 정부는 러시아 대사관에 항의서한을 보냈고 이 GRU 요원은 결국 독일 밖으로 전출됐다.
함부르크에서는 또다른 러시아 정보요원이 독일 첩보기관의 정보원들을 파악해 스카우트하려고 한 일도 있었다. 독일 당국은 러시아 정보기관 일을 하다 독일측에 투항한 사람들이 진술한 내용들을 면밀하게 검토하며 실체를 파악 중이다. 독일은 이들이 독일 정치인과 언론인 등에 접근해 각종 정보를 빼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에 투항한 러시아 스파이들이 방대한 양의 진술과 자백을 통해 독일측에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독일 체류권을 얻으려 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스탈린 정권이 1급 스파이들을 용도폐기 후 처형한 것이나 몇년 전 러시아가 과거 스탈린 시대 활동했던 스파이들의 신분을 공개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어느 시대에나 불안정한 스파이 신분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국제부/이상연 기자 lsy77@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