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HK방송 '가위질'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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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NHK방송 '가위질' 파문

NHK는 간판 프로그램인 '홍백연합전'의 전 책임 프로듀서의 제작비 착복 등 연이은 비리에 휩싸였다. 이에 따라 수신료 거부 운동이 일어나고 노동조합에서 에비사와 가츠지(海老澤勝二) 회장의 사임을 요구하는 등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에비사와 회장이 "예산안이 통과되는 3월 이후에 진퇴를 결정하겠다"고 사죄회견을 했으나 불성실한 답변으로 오히려 시청자들의 원성만 사고 말았다.

여기에 불을 지른 것이 종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에 정치적 개입이 있었음을 고발한 양심선언이었다. 이 프로그램 제작책임자(CP)였던 나가이 사토루(長井曉)가 지난 1월 13일 "지난달 내부고발을 했지만 기본적인 조사조차 진행되지 않고 있다"며 "에비사와 가츠지 회장 체제 이후 정치권의 압력이 일상화됐다"고 폭로한 것이다.

나가이에 의하면 NHK 교육TV가 2001년 1월말 종군위안부를 소재로 한 '전쟁을 어떻게 재판할 것인가'란 제목의 교양프로그램을 방영하기에 앞서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경제산업상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자민당 간사장 대리가 NHK 고위간부를 불러 프로그램 변경을 주문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례적으로 사전에 시사회가 열렸다. 결국 '일본 군인의 강간과 위안부 제도는 인도에 어긋나는 죄'이며 '쇼와 천황에게 책임이 있다'고 유죄판결을 내린,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의 내용이 대폭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강제징용 장본인

그러나 이 사실을 보도한 '아사히 신문'에 대해 두 정치인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했고, NHK측도 명예훼손 소송으로 대응하면서 시비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아베 간사장 대리는 현재 일본 국민이 차기 일본 총리 1순위로 손꼽는 정치인이다. 그는 북한 피랍자 문제에 강경 대응하는 태도를 취해 국민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그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가 태평양 전쟁 당시 한국인 납치와 강제 징용에 관여한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종군위안부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인 셈이다.

기시 전 총리는 그것을 이유로 전후에 A급 전범으로 분류되었으나 재판을 모면하고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는 자민당 초대 간사장이 되어 역량을 인정받아 총리직에까지 올랐다.

두 정치인이 이렇게 변명했지만 방송 전문가들은 방영되지도 않은 프로그램에 대해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고, 심지어 사전 검열이라는 의견까지 내놓고 있다.

현재 아베 간사장 대리는 "허위 보도한 '아사히 신문' 측에 북한 스파이가 있는 것이 명백하다"며 전면 공격에 나섰다. 이로 인해 '아사히 신문', 나가이 책임프로듀서, 여성 인권 NGO측과 NHK, 에비사와 회장, 아베 간사장 대리, 나카가와 경제산업상측의 양대 대결 구도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NHK 노조도 최근 "언론의 자유를 위해서"라며 나가이 프로듀서 쪽에 가세했다.

도쿄|이수지 통신원 buddy-su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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