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년 동안 여러 차례 사망했다고 보도됐던 자오쯔양(趙紫陽) 중국 공산당 전 총서기가 지난 1월 17일 향년 86세로 사망했다. 자오쯔양 전 총서기는 베이징 병원에서 지병인 호흡기와 심혈관 질환으로 숨졌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실각한 후 베이징 도심의 왕푸징(王府井) 자택에서 무려 16년간의 고립된 연금생활 끝에 숨진 것이다.
그의 죽음은 1980년대를 풍미했던 '공산당 제2세대' 지도부가 역사에서 완전 퇴진했음을 의미한다. 자오가 사망하면서 제2세대 지도부의 핵심으로 톈안먼 사태의 무력 진압을 지시했던 덩샤오핑(鄧小平), 톈안먼 사태 촉발의 원인을 제공했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 자오 전 총서기 등 지도자 3명이 모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자오 전 총서기의 죽음은 중국 공산당의 취약점인 '톈안먼 사태 재평가' 운동을 촉발시킬 잠재력을 갖고 있다. 중국 내외의 민주화 인사들과 진보성향의 학자, 전직 관료 등은 그동안 톈안먼 사태를 '집단소요'로 낙인찍고 무력진압한 것은 잘못이었다며 재평가를 촉구하는 한편 자오의 복권도 요구해왔다. 자오의 사망은 이를 위한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역사가 그를 공정하게 평가해야"
자오의 사망 소식은 톈안먼 사태를 주도했던 베이징대학의 구내 온라인 게시판(http://bbs.pku.edu.cn:1217/ cgi-bin/index)에서 단연 톱 뉴스였다. 한 학생은 게시판에 "역사가 그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바란다"고 썼다. 톈안먼 사태 피해자들은 조만간 자오의 명예회복을 공산당에 촉구하기로 뜻을 모았다. 인민해방군의 총격으로 불구가 된 치즈융(齊志勇)은 "중국 공산당은 톈안먼 진압이 착오였음을 인정하고 자오쯔양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 지도부는 지금까지 재평가나 복권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다. 톈안먼 사태를 계기로 일약 출세한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 사태를 강경진압한 공으로 상하이 당서기에서 공산당 수장이 된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일례다. 장 주석은 지난해 9월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후진타오(胡錦濤)에게 넘겨주면서 "톈안먼 사태 재평가는 당분간 유보하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 지도부의 핵심인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자오를 수행해 톈안먼 광장의 시위학생들을 만났던 인물이어서 미묘한 처지에 놓여 있다.
자오의 사망에 대해 중국은 예민하게 대응했다. 관영 신화통신은 그의 사망 2시간 만에 소식을 전했으나 TV와 방송은 신속히 보도하지 않게 조치했다. 중국은 이 소식을 전하던 미 CNN방송과 일본 NHK 방송 등에 대해 전파송출을 막기도 했다. 베이징의 외국신문 보급소에서는 경찰들이 자오의 사진이 실린 신문 지면을 오려냈다. 한국신문을 비롯해 자오 사망을 보도한 외국신문들은 훼손됐다. 이런 행태는 후진타오 현 주석이 자오의 사망소식을 가능하면 알려지지 않게 통제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오를 톈안먼 사태로 숙청당한 민주화의 상징인물로 보고 추종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현 중국 지도부 개혁정책의 개척자
자오쯔양은 1919년 허난(河南)성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19세에 공산당에 입당, 오랜 기간 지방의 말단직으로 돌았다. 66년 문화혁명시 광둥(廣東)성 공산당 제 1서기였던 그는 홍위병들에게 끌려나가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죄지은 사람을 끌고 다니면서 망신시키는 일)도 당했다.
자오는 71년 광둥성 당 제1서기로 복직했고 75년 덩샤오핑의 고향인 쓰촨(四川)성의 공산당 서기로 기용됐다. 쓰촨성 근무 5년 동안 자오는 공장과 농촌에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 생산성을 크게 높였다. 생산물 중 일부를 업적에 따라 개인에게 나눠주는 이 제도로 쓰촨성은 중국 최대의 자본주의 경제 실험장으로 변했다. 이를 눈여겨본 덩샤오핑은 80년 4월 그를 국무원 부총리로, 그해 9월 총리로 승격시켰다.
자오는 87년 1월 후야오방 총서기의 후임으로 발탁돼 생애 최고 시기를 맞아 과감한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단행했으나 살인적 물가고와 민심 동요에 맞닥뜨린다. 89년 4월 대학생들은 후야오방의 죽음을 추모한다며 톈안먼 광장에 몰려 민주화 요구를 시작했다. 자오는 당시 톈안먼 광장에 나가 "학생들의 뜻은 이해하지만 역효과를 낼 수 있다"면서 해산하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선동적이며 체제위협적으로 인식했다. 자오가 민주화 시위를 체제를 개선하려는 애국적 행위로 받아들인 것과 달랐다. 덩이 그를 공직에서 해임해 자택에 연금한 것도 그래서다. 그는 항일전쟁의 동지인 아내와 함께 연금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복권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중국 현대사의 흐름을 되돌려놓은 텐안먼 사태 당시의 인물들은 지금 모두 권력의 핵심에서 멀리 있다. 덩샤오핑은 이후 막후에서 개혁개방을 총지휘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다 97년 사망했다. 자오쯔양과 권력다툼을 벌였던 보수파의 대표주자 리펑(李鵬) 총리는 98년 주룽지(朱鎔基)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하지만 톈안먼 사태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 이뤄질 경우 이들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당시 군부의 실세로 무력진압을 진두지휘했던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은 98년 사망했고, 그의 동생 양바이빙(楊白氷)도 군부 최고실력자로 발돋움했으나 93년 물러났다.
사태진압 후 수배됐던 학생 지도부 21명 중 11명은 서방으로 망명했고,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10명 중 3명은 행방불명이다. '수배 1호'였던 왕단(王丹)은 중국에서 10년간 수감생활을 하다 98년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방문 직전 석방됐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현재 하버드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미 조지워싱턴 대학의 중국정책계획부장이며 자오쯔양 전문가인 데이비드 샴보는 "자오가 위대한 것은 경제개혁이 정치개혁과 맞물려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샴보는 "후진타오 총리 등 현 지도부가 구상중인 제한적 정치개혁은 이미 자오가 오래전 제안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경제개혁 방안은 현재 중국이 이행중인 시장경제의 여러 측면에 반영돼 있다. 덩샤오핑의 개혁은 대부분 자오의 아이디어에서 따온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 현 지도부는 경제는 풀어놓고 정치는 사회주의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경제와 정치의 개혁이 서로 맞물려 있음을 간파한 자오는 중국의 진정한 개혁자로 평가받을 것이다. 그의 잠재적 파괴력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설원태 [국제부기자]solw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