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차별 '과거사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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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미국 미시시피주의 어느 마을에서 흑인 민권 운동가 3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FBI 요원인 워드가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되는데 그는 이곳의 보안관 출신인 앤더슨과 현지에 파견된다. 그러나 실종된 사람들은 이미 KKK 단원들에게 살해된 뒤였으니.... 백인 우월주의가 팽배한 미시시피주 보안관은 살인 내막을 알면서도 범인들을 비호한다. 현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원칙주의자인 워드 반장은 어려움을 겪고, 능청맞은 앤더슨은 주민과 보안관을 만나면서 범인 일당에 대해 심증을 굳힌다.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점인데....'

진 해크만, 윌리엄 데포,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주연을 맡고 알란 파커 감독이 연출한 1988년 영화 '미시시피 버닝(Mississippi Burning)'의 줄거리다.

미국 남부 미시시피주의 작은 마을 네쇼바 카운티에서 발생한 흑인 민권 운동가 3명의 피살사건이 40여년 만에 미 전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당시 이 사건의 행동책으로 알려졌던 에드가 레이 킬렌(79)이 다시 살인혐의로 기소됐기 때문이다.

당시 백인 배심원들 유죄판결 거부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CNN 등은 이번 재판을 미국의 영원한 골칫거리이자 치부인 남부 흑백차별 관행에 대한 '과거사 청산'으로 비유하며 비중있게 보도하고 있다.

이 사건이 단순히 '장기 미제 살인사건'이 아니라 '과거사'인 것은 1960년대 특히 미시시피주를 지배했던 흑백차별 속에서 당시 주(州) 검찰 당국이 사건수사에 미온적으로 대처했고, 그 결과 진상규명과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주 검찰 당국에 맡겨놓아선 진상규명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연방수사국(FBI)이 연방법인 민권법 위반혐의를 내세워 개입하기도 했지만, 민권법 위반 외에 살인혐의로는 기소할 수 없었다. 특히 이번에 법정에 선 킬렌은 백인 배심원들이 유죄 평결을 거부함으로써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석방돼 흑인사회를 분노하게 만들었던 주인공.

역사적인 새 재판은 지난해 가을, 주도(州都)인 잭슨에서 수백 명의 주민과 민권 운동가들이 신임 짐 후드 주 법무장관에게 재수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촉발됐다. 현지 언론이 관심을 가지고, 이 소식이 미 전역으로 확산되자 후드 장관은 마침내 휘하의 마크 던컨 검사에게 재수사를 지시, 킬렌을 체포하고 기소하기에 이른 것이다.

던컨 검사는 첫 심리가 끝난 뒤 "마을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소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 기소가 해묵은 상처 치유에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의욕을 내비쳤다.

AP통신은 "이제 킬렌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을 만날 것"이라며 "이번 법정에서는 피고뿐 아니라 당시 그 범죄를 낳았던 사회체제도 심판받게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통신은 "이제 몸이 구부정해진 고령의 노인을 법정에 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나치 전범들에 대한 수십 년간에 걸친 이스라엘의 끈질긴 추적과 법의 심판을 사례로 들었다.

현지 민심은 흑과 백으로 양분

과거 미 남부지역 민권 운동가 중 한명인 로렌스 기요는 CNN 방송 인터뷰에서 "나도 1964년 6월 운명의 그날 밤 희생된 다른 3명과 같은 차를 타고 갈 뻔했다"며 "옳은 일을 하는데 너무 늦었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CNN은 최근 미시시피 종교 지도자회의(MRLC)가 이번 사건과 관련한 제보자에게 지난 12월 10만달러의 포상금을 내걸었다고 보도했다. 포상금 덕분인지 몰라도 검찰이 킬렌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확보했다는 소문도 흘러나오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40년 전 범인들을 싸고돌았던 네쇼바 지역도 세월이 흘러 상당히 바뀌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한다. 휴양시설과 카지노 덕분에 외지 관광객과 일자리가 늘고 사회적 약자였던 흑인의 위상도 상당히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실제 네쇼바에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흑인이 대규모 사업체를 소유하고 있고 공직에도 진출해 있다. 물론 현지 민심은 아직도 흑과 백처럼 양단된 상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주민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킬렌의 죄는 용납할 수 없다면서도 가는귀까지 먹은 79세 노인을 처벌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한 68세 변호사도 "이제 그만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갔으면 좋겠다"며 과거사 청산의 무익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백인우월집단 KKK단이 날뛰던 지역이라는 과거의 오명이 되살아나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현지 주민도 적지 않다.

반면 프린스(40)라는 이름의 한 주민은 "상처를 치유하려면 상처를 열고 깨끗이 소독해야 한다"며 "지난 40년간 팔뚝에 난 깊은 상처에 아무 치료도 하지 않고 그저 붕대만 감아둔 셈"이라고 청산론을 편들었다.

미시시피주 검찰에 대한 반응도 엇갈리고 있다. 이번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흑인 민권 운동단체들은 재수사를 결정한 후드 장관과 던컨 검사 두 사람 모두 백인이지만, 전임자들과는 다른 전향적 인식을 가졌다는 데 희망을 걸고 있다. 반면 흑인 피살자의 동생인 제임스 체이니 같은 이는 백인 검찰에 대해 여전히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검찰이 부유하고 힘센 백인들은 가만 두고 잔챙이만 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뉴욕타임스'도 미시시피주와 네쇼바 카운티 검찰이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킬렌을 상대로 살인혐의 적용을 미뤄왔다는 점을 들어 일말의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의 과거사 청산이 최근 한국에서 진행되는 보수-진보의 과거사 청산과 놀랄 만큼 흡사하다는 점이다. 먼저 킬렌 등 가해자들은 40년 전 자신들이 저지른 범행이 공산주의를 막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정당행위였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죽인 흑인 민권 운동가들은 지역 사회를 위해 제거해야 할 '빨갱이들'이었다는 얘기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가해자의 위력이 여전한 것도 비슷하다. 킬렌에 대한 첫날 심리가 끝나자마자 법정을 폭파하겠다는 극우 백인들의 협박이 있었고, 킬렌의 동생은 현장을 취재중인 TV 카메라맨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또 지난해 이 사건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던 시카고 지역 여고생 3명을 지도한 한 교사는 "킬렌과 전화 인터뷰를 한 학생들 이름이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만든 웹사이트에 올랐다"고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지 않았다.   

이상연[국제부 기자] lsy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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