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카 앵커' 마감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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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NBC, ABC, CBS 3대 방송뉴스를 20여년간 진두지휘해왔던 '트로이카 앵커시대'가 저물고 있다.

NBC 앵커인 톰 브로커(64)는 지난 12월 1일 [나이틀리 뉴스(Nightly News)] 고별방송을 했고, CBS 간판 프로그램인 [60분(60 Mimutes)]의 진행자 댄 래더(73)도 내년 3월 9일을 기해 물러난다고 발표했다. 이날은 그가 미국 역사상 최고의 앵커로 불리던 월터 크롱카이트에게서 앵커직을 물려받은 지 정확히 24년이 되는 날이다. 나머지 한 사람인 ABC의 피터 제닝스(66)는 퇴임계획을 밝히지 않았지만, NBC가 45세의 브라이언 윌리엄스를 새 앵커로 기용하는 등 경쟁사들이 뉴스 전면에 젊은 앵커를 내세우고 있어 그의 얼굴을 마주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예상된다.

1980~90년대 매일 저녁 수천만명의 시청자를 사로잡았던 브로커와 래더, 제닝스의 방송경력은 엇비슷하다.

[월드리포트]'트로이카 앵커' 마감 뉴스

래더는 오보 책임지고 사임

그는 미국 최고의 선거전문기자로 꼽힌다. 68년부터 대통령 선거 현장을 누비기 시작한 브로커는 부시 대통령과 존 케리 상원의원이 맞붙은 지난 11월 대선까지 무려 10번의 대통령 선거를 취재했다. 지난 7월 말 보스턴 민주당 전당대회, 8월 말 뉴욕 공화당 전당대회 등에서 그를 직접 접한 한국 언론의 워싱턴 특파원들은 브로커가 수습기자처럼 현장을 누볐다고 전했다. 취재수첩을 꺼내들고 메모하는 모습이나 테러를 대비한 경찰의 검문검색에도 다른 이들처럼 기꺼이 응하며 발로 뛰는 모습에 감동받았다는 것이다. 2001년 미국이 테러 공포로 떠들썩했을 때 브로커에게 탄저균 우편물이 배달됐던 일은 방송계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강하고 단단한 눈매를 지닌 헤비급 권투선수 같은 래더는 브로커나 제닝스에 비해 진보적이고 저돌적인 스타일이다. 중국의 톈언문 사건 당시 미국 앵커로는 유일하게 현장보도를 했고 걸프전쟁 때는 사담 후세인 당시 이라크 대통령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래더가 총괄 제작하는 [60분]도 여느 뉴스 프로그램과 다르다. 사건현장과 경험자, 목격자를 중시하는 탐사보도로 화제를 일으키고 이슈를 만들어낸다. 지난 5월 방송된 [부카 수용소 비디오일기]는 미군의 이라크인 학대 참상을 고발한 폭로였으며 부시 대통령의 병역비리 문제를 다룬 보도 역시 한동안 선거판을 뒤흔든 '특종'이었다. 물론 그가 직접적인 증거로 제시한 부시의 군복무기록 자료가 조작된 것으로 드러나 CBS가 공식사과하는 사태가 빚어졌지만 그는 스스로 옷을 벗음으로써 확실히 책임지는 사나이다운 모습을 보였다. 그는 유명인사 스캔들이나 자극적인 사건 보도를 지양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시청률 하락에도 불구하고 2001년 실종된 의회 인턴 샌드라 리비와 하원의원의 스캔들을 보도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이유로 그의 적은 적지 않다. 미국 미디어연구센터 소장 브렌트 보젤은 CBS가 NBC나 ABC에 밀리는 이유로 래더의 오만함을 들고 있다. 반면 래더를 신념 있는 애국자라고 높이 평가하는 칼럼니스트 칼 토머스 같은 이도 있다.

텍사스 출생 댄 래더, 사우스 다코다 출생 톰 브로커는 전형적인 시골 출신으로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목소리와 얼굴을 갖고 있다. 둘 다 지방 방송사에서 기자를 시작해 백악관 출입기자를 지냈다는 점도 일치한다. 이에 비해 캐나다 오타와에서 자란 피터 제닝스는 백악관 출입기자가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15년간 해외에서 생활한 특파원 출신이다. 학력도 고졸에 불과하다. 그는 또 톰 브로커나 댄 래더와 달리 이혼한 경력이 있고, 제임스 본드와 같은 외모에도 불구하고 앵커에 기용됐다가 중도탈락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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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 브로커는 '떠날 때가 됐다'는 이유로, 래더는 대선기간에 발생한 오보사건으로 물러나게 됐다. 이들의 퇴장은 시대변화를 상징한다. 뉴스 전문 케이블TV와 인터넷을 비롯한 뉴미디어 등장으로 공중파TV의 변신이 불가피해졌다는 사실이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미국 3대 방송 뉴스의 전체 시청자 수는 하루 평균 3천6백만~3천8백만명이었지만 현재는 2천8백만명으로 떨어졌다. 81년 84%에 달했던 3대 방송 뉴스시청률은 지난해 43%로 추락했고 80년대와 90년대 미국 정계를 좌지우지했던 3대 앵커들의 영향력도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하락했다. 특히 케이블 뉴스의 영향력 확대는 미국 지상파 방송 뉴스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지난 8월 미 공화당 전당대회 보도에서 케이블 방송인 폭스뉴스가 3대 지상파 방송을 제치고 시청률 1위를 차지한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높은 연봉도 세대교체 재촉

이와 함께 방송사들이 폭로성 보도보다 가벼운 뉴스에 관심을 보이는 추세도 메인 뉴스가 위축되는 요인이다. 방송사들이 위험이 따르는 탐사보도를 꺼리는 바람에 특종보도가 줄어들고 있으며 뉴스에 배정된 예산도 대폭 삭감되는 추세다. 

지난 20년간 무려 5배나 뛰어오른 3대 앵커들의 높은 연봉(약 1천만달러), 60대를 넘어선 이들의 나이도 시대변화를 재촉하고 있다. 20년 이상 뉴스를 진행한 노련함과 전달력, 분석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신선감과 패기가 없다는 평가다.

2002년 5월 발표한 은퇴계획을 실행에 옮긴 브로커는 앞으로 개인생활이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 더욱 치중할 예정이다. NBC와의 계약에 따라 방송을 완전히 중단하지는 않지만 1년에 몇 차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정도다.

브로커는 마지막으로 진행한 [나이틀리 뉴스] 말미에 그동안 성원해준 시청자와 고락을 같이 한 동료들에게 감사하면서 "여기에서 내가 배운 교훈은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은 질문이 아닌 대답이며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한 사람도 정답을 갖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래더 역시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앵커직에서 물러나는 대신 탐사보도 프로그램의 현장기자로 활동할 작정이다.

칼 토머스는 그러나 최근 [워싱턴 타임스] 기고문에서 래더와 브로커의 퇴장을 '공룡시대 종말'에 비유하며 그들 같은 유형의 앵커는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상연[국제부 기자] lsy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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