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권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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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을 아무리 아무리 저 세상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해도 때없이 맞닥치는 겨울비 같은 좌절과 낭패를 들켜지고마는 굴욕과 수모를 불싸질러 흔적없이 사루어주는 45도 화주(火酒) 안동소주 사나이의 눈물 같은 피붙이의 통증 같은 첫사랑의 격정 같은 내 고향의 약술..." -유안진의 시 [안동소주]중에서

현진건이 '술권하는 사회'를 썼던 1930년대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가 절정을 달리고 있던 시절이다. 군국주의 통치가 굳어지면서 식민지배의 고삐를 죄기 시작한 일제는 사상통제와 지식인에 대한 탄압정책을 강화했다. 일제에 협력하지 않는 지식인들은 대부분 일정한 직장도 생업도 없이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았다. 그들에게 유일한 위안이 있었다면 술에 대취해 잠시나마 뼈아픈 현실을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현진건의 '술권하는 사회'는 바로 그런 식민지 현실을 그린 소설이다.

얼마 전 재정경제부가 국정감사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해동안 우리 국민들이 마신 소주가 29억병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삼성경제연구소는 우리나라 직장인 4명 중 1명은 알코올 의존성을 갖고 있다는 자료를 발표했다. 점잖게 얘기해서 알코올 의존성이지 정직하게 말하면 알코올 중독이다. 이런 통계는 우리나라 성인남자 대부분이 술어 절어 산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일제 식민통치가 끝난 지 이미 반세기가 지났고 권위주의 통치를 마감한 지도 십 여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소주 소비가 해마다 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술 마실 구실이 많다는 얘기다. 그 많은 음주인구 중에는 즐거워서 마시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속상해서 마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음주인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사회적 스트레스가 그만큼 크다는 증거다.

술 많이 마시는 것으로 정평이 난 나라는 오랫동안 스탈린의 철권통치 아래서 살았던 러시아다. 언젠가 러시아의 보건차관은  러시아인의 과음(過飮)이 국가안보차원에서 문제가 되었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2001년 한해동안 과음으로 숨진 사람이 4만7천여명이고 80년대엔 한해 술 판매고가 국방예산의 2배를 넘어선 적도 있다는 것이다. 84년엔 체코로 기동훈련을 나간 기갑부대 장병 4명이 보드카 2병에 탱크를 팔아넘긴 어처구니없는 사건도 있었다.

지난 한해동안 우리 국민들이 마신 소주 29억병은 전년에 비해 4-6% 늘어난 것으로 값으로 따지면 무려 2조1천2백29억원, 국가예산을 얘기할 때나 들어보던 액수다. 같은 기간에 위스키나 맥주의 소비는 각각 6.7%, 3.7%로 줄어든데 비해 상대적으로 값이 싸고 알코올 농도가 높은 소주의 소비가 늘었다는 것은 '겨울비 같은 좌절과 낭패를 불싸지르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계속되는 불경기로 주당(酒黨)들의 주머니가 그만큼 가벼워졌기 때문일까.

작가 최일남은 '소주의 슬픔'이란 소설에서 '술은 곧 미디어'라는 말로 소주의 효능을 피력한 적이 있다. 맨정신으로 견뎌내기 어려운 세상을 살다보면 소줏잔을 기울이며 힘들고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털어놓을 '판'이 필요하다는 뜻일 게다. '소주 권하는 사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풍진 세상이 그만큼 팍팍하고 힘들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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