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감사가 시작되자마자 예상했던 대로 여기저기서 파열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민심을 읽을 수 있다는 추석 명절이 지나고 며칠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국감에서는 서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신경 쓰는 시늉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역시 우리 정치인들에게는 그런 '사소한' 문제보다, 보안법과 행정수도 이전, 과거사 청산과 같은 거대담론이 더 긴박하고 절박한 문제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서민들의 정서와 동떨어진 정치-이념-노선투쟁을 벌이는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우리 사회 전체가 그런 문제로 패싸움에 휘말리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의 당파싸움을 어제 오늘 보아온 것도 아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정치인들의 싸움은 다양한 이익집단간 갈등을 대행하는 기능도 있기 때문에 무조건 매도할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치 싸움을 관전하거나 중개 해설하고, 때로는 심판해야 할 사람들까지도 패를 갈라 싸움판에 뛰어든다면, 그것은 이미 난장판이지 더 이상 공정한 정치 게임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언론은 언론대로, 시민단체는 시민단체대로, 원로와 종교인은 그들대로 모두 편가르기 싸움에 휩쓸려 막말을 해대는 오늘의 사태는 정말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참여민주주의 시대에 누구든 자기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고, 그런 의미에서 중대한 정책 이슈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우려할 일은 아니다. 사실 자유와 민주주의가 확산되는 과정에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는 백가쟁명시대 (百家爭鳴時代)가 등장하는 것은 오히려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의 논쟁 문화는 다채로운 색조를 띠는 백가쟁명시대를 연출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과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담론문화에서 거대담론을 주제로 하면서도 그에 걸맞은 치열한 철학적 고민이나 긴장의 흔적도, 시대정신에 대한 철저한 통찰력도 찾아볼 수 없다면 지나친 혹평일까.
논쟁과 토론의 깊이도 일천하지만, 무엇보다도 백가쟁명식 다양성과 자유 분방함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시대에 뒤떨어진 이념논쟁과 과거사 청산도 그렇지만, 개성과 다양성, 복합성을 강조하는 21세기에 찬반의 흑백논리에 매몰되어 패싸움을 일삼고 있는 우리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컬러 시대에 흑백 TV를 보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일은 일견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듯한 이슈들, 이를테면 국보법 같은 이슈들은 냉정하고 합리적인 눈으로 보면 당파적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은 데도 그런 공통 분모를 찾으려고 협상하고 화해하고 협력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정책 이슈의 차이점을 흑백논리로 재단해서 정책 논쟁을 보수와 진보, 참과 거짓, 정의와 부정의, 도덕과 부도덕의 싸움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책이슈를 이념과 진리, 그리고 도덕의 문제로 왜곡 과장하고, 모든 사람을 적과 동지로 나누어 우리편은 무조건 진리이며 정의이고, 도덕적이며, 반대파는 언제나 비도덕적이고, 허위와 부정의의 상징이기 때문에 멸시와 파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담론 풍토는 우리 모두를 21세기의 패배자로 만들 것이다.
이제라도 내가 신봉하고 있는 진리가 상대적이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타인의 존재와 나의 것과 다른 진리와 공존하고, 협력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성숙한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서진영 [고려대 정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