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청와대 홈페이지 '열린마당' 코너에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성적으로 패러디한 화면이 실려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는데, 이번에는 한나라당이 연찬회 풍자극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육두문자를 써가며 거칠게 조롱해 물의를 빚고 있다.
이처럼 여야가 낯뜨거운 저질정치 공박을 벌이면서 갈등과 분열을 과장하여 상대방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려는 네거티브 정치를 전개하고 있다. 여당은 과거사 청산을 명분으로 반대세력을 과거 권위주의 독재시대의 기득권 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 데 그치지 않고,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친일 반민족세력까지 포함한 현대사의 모든 기득권 세력을 '청산'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야당은 야당대로 정체성 논쟁을 제기하면서 노 대통령과 일부 여당 인사들의 사상적 편향성을 강조하면서 현재의 정권을 좌파정권이라고 맹공하고 있다.
물론 여야간 이념논쟁의 현실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치권의 이념논쟁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 사회에 실재하면서도 표출될 수 없었던 갈등과 균열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탈냉전과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의 뒷면에 숨겨져왔고, 억압되어왔던 어두운 과거와 갈등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제각기 역사의 심판장에서 제몫을 찾으려고 하면서 불가피하게 현대사에 대한 이념논쟁이 증폭되고 있는 측면도 있다.
정치권과 우리 사회 전반에 번져가고 있는 과거사 논쟁과 이념논쟁의 위험성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이미 열린우리당 신기남 전 대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과거사 논쟁은 자칫 잘못하면 개개인의 조상들의 행적을 들쳐내 정적을 공격하는 비열한 정치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고, 이념논쟁 역시 정책과 노선의 차이를 적과 동지 간의 투쟁으로 양극화시키고, 정책논쟁을 감정과 이념으로 색칠하여 정치과정을 '저주의 굿판'이나 '증오의 정치'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이념논쟁이 안고 있는 더 큰 문제점은 정치권이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반대로 앞장서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를 실체보다 더 증폭시키고 왜곡함으로써 사회적 해체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탈냉전시대의 이념논쟁과 냉전시대의 이념논쟁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냉전시대의 이념논쟁은 세계와 우주를 지배하는 진리와 정의를 대표하는 이념이 무엇인가, 그리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세계관과 패러다임은 어떤 것인가를 결정하는 싸움과 경쟁이었다. 탈냉전시대에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세계관과 패러다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념논쟁의 대상은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대치할 수 있는 혁명적 체제와 이념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인가를 둘러싼 논쟁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탈냉전시대의 이념논쟁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 합의가 존재하는 바탕에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정도와 종류에 대한 정책논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탈냉전시대의 좌파와 우파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며, 그런 점은 우리의 여야 정치세력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 정치권에 이념논쟁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기보다는 탈냉전시대에 적합한 논리와 실체를 반영하는 이념논쟁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이념논쟁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기보다 오히려 사회적 다양성과 유기적 연대감이 증진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