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만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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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영어를 가르쳐야 쉽게 배운다며 몇 년 전부터 초등학교 상급반에 영어과목을 도입했다. 일부 학부모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영어과외를 시키고 어학연수를 보내기도 한다. 심지어는 옹알올알 말을 배우는 아이를 미국인 유아원이나 유치원에 보내 영어를 배우게 하기도 한다. 우리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에게 너무 일찍부터 영어를 배우게 하면 오히려 혼란만 일으키게 하고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반론이 있기는 하지만 조물주는 어린 시절에만 언어를 완벽하게 습득하도록 만들어놓았다. 언어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운동도 어렸을 적에 익힌 것이 평생 간다. 언어학자에 의하면 인간은 열 살까지만 언어를 완벽하게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입양 가서 20년 동안 한국인을 만나보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을 어느 국제회의에서 만난 일이 있다. 그는 우리 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한국에 대해서도 어렴풋한 기억만 있을 뿐 한국의 동요조차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구사하는 영어가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미국인들에게 그 정확도를 물었더니, 거의 맞지만 전치사와 관사가 가끔 틀린다고 했다. 부분적인 언어장애인이었다.

외교관이나 상사주재원과 같이 이 나라 저 나라로 이사를 자주 다녀야 하는 사람들은 어린 자녀의 교육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한다. 언어학자들은 "유아시절에는 5개의 언어를 동시에 완벽히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언어 습득에 관한 한 이 말은 대체로 맞을지 모르지만, 아이들이 겪는 마음의 상처는 커서도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 어린 아이가 잠을 깨서 하루를 보내는 동안 항상 무엇인가 경험하고 배우게 되는 것이므로, 해외에 있으면 현지 생활을 할 것이고, 국내에 있으면 우리 주변의 것을 익힐 것이지만, 배우고 경험하는 총량은 같을 수밖에 없다. 외국어와 외국 문물을 익혔다면 그 시간에 익혔어야 할 우리 것을 그만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미국 유학을 오래 한 데다 직업상 해외여행이 잦고 항상 여러 가지 외국어를 사용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필자가 외국어를 좀 구사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필자가 외국어를 공부하느라 잃은 것도 적지 않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필자는 유아시절부터 서당에 다녔다. 한글을 모르는 상태에서 한문을 먼저 배운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비로소 한글을 배우고 숫자도 썼다. 부모님은 이때부터 일본어를 가르쳤다. 필자는 일본 동화책을 읽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서당에 다녔고 상급반부터는 중국어를 접하게 돼 중-고등학교 때는 화교 학생들과 어울렸다. 중국어나 일본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필자는 행운아로 보일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것을 배우느라고 잃은 것도 많다.

직업상 늘 서양 문물을 접하며 사는 필자의 뇌리에는, 아직도 어릴 적에 접한 동양 고전의 영향이 남아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 가면 헌책방을 전전하는 것이 취미다. 제자들이 찾아와서 교양도서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나는 주저없이 소학(小學)이나 사서삼경(四書三經) 같은 동양의 고전을 권한다. 시대가 그래서인지, 내가 권한 책들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세계를 누비며 국제적인 학문을 한다는 교수가 고리타분한 책들을 읽으라고 권하다니, 실망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나 또한 그들이 한자가 섞인 책을 읽기를 꺼리고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써보라면 꼬질꼬질하게 그려놓는 것을 보고 한심해한다. 한껏 자란 그들이 일본과 중국에 가서 의사소통이 안 되어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딱하다. 이런 배경에 설령 고전을 본다고 한들 그 이치(理致)가 제대로 몸에 배어들지 의문이다. 어릴 적부터 배워야 할 것은 너무나 많다. 필요하고도 귀중한 것을 골고루 배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상면〈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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