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49재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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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저께 우리는 그를 보냈습니다. 죽은 뒤 49일째에 치르는 불교식 제사의례를 통해서입니다. 원래 49재는 죽은 이가 다음 세상에서 좋은 곳에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비는 의식입니다. 불교에서는 죽은 이의 다음 세상에서의 삶은 그의 생전의 업에 따라 결정된다고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음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의 생전의 업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 지에 달려 있겠습니다.

모든 죽음은 교훈을 줍니다. 산 모습으로는 다시 못 보는 사별이라는 상실의 고통과 함께입니다. 이 교훈은 산 이에게는 자극을 줍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남겼을까요. 우리는 그 교훈을 알고 있기라도 한 걸까요.

죽은 이에 대한 평가는 늘 관대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입니다. 좋은 점은 추앙받고 설혹 아름답지 못한 언행은 구태여 언급하려 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죽음이든 애도하고 안타까워하는 게 세상 인정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를 좋아했든 싫어했든, 그에게 동의했든 반대했든 말입니다. 상가에서 고인의 가족이나 친지가 슬퍼하는 것을 두고 산 자의 존재감의 표현이라고 묘사한 소설가도 있지만 어디 그것만이겠습니까. 고인과 공유한 경험, 영원한 사별에서 비롯된 슬픔이 한 조각쯤은 담겨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죽은 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올 들어 우리는 기억해야 할 죽음과 유난히 자주 만났습니다. 노 전 대통령 말고도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고 미국 팝 가수 마이클 잭슨이 작고했습니다. 용산참사 때도 시민 5명과 경찰 1명이 생목숨을 앗겼습니다. 무소유·봉사의 삶을 실천한 김 추기경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국민이 참석해 명복을 빌었습니다. 김추기경은 사랑과 용서, 화해라는 화두를 남겼습니다. 논란 많은 삶을 산 마이클 잭슨의 장례식은 ‘세기의 장례식’으로 불릴 만큼 화제를 모았습니다. 1만7000명으로 제한된 장례식 자리는 180만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고, 3110만 명이 장례식 생중계를 지켜 봤습니다. 기이한 행태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한 그가 세상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음악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라면 정답일까요.

아직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용산참사 희생자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정상이 아님을 웅변합니다. ‘공권력에 의한 살인’이 아니냐는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어서입니다. 가진 자들에게 과도하게 관대한 현 정권의 성격을 부각시킨 공로도 얹고 싶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그는 무슨 교훈을 남겼을까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지역주의 극복, 사람 사는 세상…. 저는 그 때마다 그의 소박한 미소를 떠올립니다. 국민을 향해서는 좀처럼 웃지 않고 외국 정상을 만날 때만 함박웃음을 짓는다고 지적받는 이명박 대통령과 달리 늘 국민을 향해 있던 그의 미소를 말입니다. 옷깃을 여미며 그의 49재를 위클리경향에 담아 봤습니다.

<조호연 편집장 c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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