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내 목소리를 들어줘”···소외된 이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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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컨선드 아더스>·<유령>,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다원융합극 <컨선드 아더스>는 1인극의 진수를 보여준다. 퍼포머는 중독자들의 목소리와 미니어처의 이미지를 연결해 촬영하며 그들의 세밀한 속내를 세상에 중계한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사진 크게보기

다원융합극 <컨선드 아더스>는 1인극의 진수를 보여준다. 퍼포머는 중독자들의 목소리와 미니어처의 이미지를 연결해 촬영하며 그들의 세밀한 속내를 세상에 중계한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박천휴·윌 애런슨 작, 박천휴 작사, 윌 애런슨 작곡)은 ‘쓸모를 다한’ 헬퍼봇 이야기다. 서울 외곽 로봇 아파트에 머무는 올리버와 클레어는 고장 난 배터리를 고치며 서로를 알게 된다. 잔잔하지만 소외된 이들의 삶은 올리버가 인간 친구 제임스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로 향하며 변한다. 2024년 11월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6개월여 만에 공연예술계의 아카데미상인 토니상 작품상과 음악상 등 6개 부문을 석권한 이 작품의 미덕은 시적인 가사와 라이브 재즈 음악에 눅진한 ‘인간애’다. ‘소외된 이들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는 한국 소극장에서 출발한 이 작품을 세계적인 뮤지컬로 키운 기폭제다. 최근 공연예술의 방향성 역시 그러하다. 중독자들의 목소리를 미니어처와 퍼펫으로 표현한 <컨선드 아더스>, 무연고자들의 존재와 연극인들의 실존을 엮은 <유령>, 중증장애인의 성적 욕구에 대한 세밀한 보고서 <헌치백>, 마지막 해녀와 이민자의 정체성 찾기인 <엔들링스> 등 세계 초연 혹은 아시아 초연인 이들 작품은 창의적인 무대 미학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창의적인 무대 미학으로 주목

연극 <컨선드 아더스>(Concerned Others, 알렉스 버드 작·연출·퍼포머)는 약물 및 마약·알코올 중독자들과 그들의 가족, 의료진, 정책가 등의 인터뷰로 구성한 다큐멘터리 다원융합극이다. 반달 모양의 LED 테이블 위에 놓인 여러 크기의 빌딩과 집, 미니어처 인형들은 일상적인 삶의 공간을 형성한다. 실제 인터뷰와 연동된 미니어처 이미지들을 퍼포머가 라이브 캠으로 촬영하면 상단에 걸린 스크린에 영사된다. 팬데믹 이후 스코틀랜드 중독 사망률 급증의 심각성을 깨달은 창작진들이 관계자 60여명을 취재하고 분석한 결과물이다. 21시간 분량의 인터뷰 오디오 파일을 편집해 러닝타임 55분에 압축한 스코틀랜드 극단 ‘토터스 인 어 넛셸(Tortoise in a Nutshell)’의 작품으로 아시아 초연이다. 퍼포머는 퍼펫과 여러 가면을 운용하며 삶에 문제가 있거나 외모가 형편없을 거라는 편견에 내몰린 중독자들의 이중고와 극복 노력을 자세히 전달한다. 또한 중독성 약과 음료에 대한 광고와 인기 드라마 PPL 등 사회 시스템의 방조를 관련 영상 이미지들을 통해 드러낸다.

중독자 중에는 삶을 놓고 자신도 놓아버려 무연고자로 떠도는 경우도 있다. <유령>(고선웅 작·연출, 심재욱 무대, 류백희 조명)은 무연고자의 삶과 죽음, 이를 연기하는 연극배우들의 혼돈, 개개인의 사적 고뇌까지 파고드는 여러 층위의 작품이다. 어디까지가 대본이고 어디까지가 실제, 혹은 애드립인지 관객들은 끝까지 어리둥절하다. 폭력 남편(강신구 분)을 피해 본명을 숨기고 정순임으로 살다 사망한 배명순(이지하 분)은 무연고 시신으로 영안실에 장기 안치되며 비슷한 처지의 유령들을 만난다. 무연고 영혼 우점수(신현종 분)와 황종배(홍의준 분)는 어이없이 사망한 것도 기막힌데 영혼이 돼 더 고독해진 존재들이다. 처연한 무연고자들과 이들에게 상처를 가하는 캐릭터로 분한 선후배 배우들은 극과 현실을 넘나드는 대본에 불만이 많다. 무대감독(이승우 분)과 분장사(전유경 분)는 배우들이 캐릭터를 연기하게 돕지만 모두 선배들이라 고충이 크다. ‘이따위 연극 안 하겠다’고 뛰쳐나갈 때마다 연출자의 전언을 스피커폰으로 전하며 중재한다. 아무리 배우지만 처연한 삶을 더 처연하게 하는 극적 장치들이 불편하다. 배명순을 비롯한 무연고자들을 천도하는 제사장(김신기 분)이 등장하고 극도 급전환된다. 시신이 솟아오르고 배우들은 자신의 모습을 본뜬 데스마스크와 직면한다. 분장실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민얼굴의 자아와 두꺼운 캐릭터를 쓴 자아를 인식할 때와는 또 다른 인간 본연의 존재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다.

당사자성에 집중한 연극 <헌치백>은 중증장애인의 성적 욕망과 세상의 무관심을 라이브캠과 자막, 퍼포먼스, 낭독 등 다양한 무대미학을 통해 감각하게 이끈다. 국립극장 제공 사진 크게보기

당사자성에 집중한 연극 <헌치백>은 중증장애인의 성적 욕망과 세상의 무관심을 라이브캠과 자막, 퍼포먼스, 낭독 등 다양한 무대미학을 통해 감각하게 이끈다. 국립극장 제공

중증장애인의 성적 욕구를 드러낸 <헌치백>(이치카와 사오 원작, 김도영·김진숙 윤색, 신유청 연출, 허윤경 안무, 이엄지 무대, 강지혜 조명, 고동욱 영상)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 소외된 인간의 본능에 대한 성찰적 보고서다. 중증장애인은 무성적 존재일 거라는 세상의 착각에 던지는 조소이기도 하다. 선천성 근세관성 근병증을 앓아온 이치카와 사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을 무대화 한 세계 초연작이다. 작품은 시작부터 강렬하다. 성행위 묘사가 노골적인 문장을 여러 배우가 번갈아 가며 낭독하듯 연기한다. 포르노 소설을 연재하는 샤카(황은후·차윤슬 2인 1역)의 상상이기도, 현실이기도 하다. 인공호흡기와 전동휠체어에 의지하는 삶이지만, 직접적인 성행위를 통해 임신하고 다시 중절하겠다는 열망을 실천하고 세상의 무관심과 무지를 풍자한다. 무대는 장면에 따라 유연하게 나뉜다. 샤카의 성적 욕망은 라이브캠으로, 대사는 자막으로 무대 위와 좌우에 영사된다. 샤카의 실제 침상, 그가 써내려가는 포르노 소설 등 현실과 가상이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무대 전면과 후면이 입체적으로 상호작용하며 활짝 열린다. 샤카의 욕망과 고뇌를 여러 감각으로 확장해 전달하기 위한 전방위 무대 미학이다. 쉬쉬해온 사적 담론을 여러 예술가의 재해석을 통해 다양한 관객과 함께 논하는 공연장 자체가 원작자의 열망을 실현한 장이기도 하다.

작고 사소한 이야기 안에 진실이 있다

<엔들링스>(셀린 송 작, 이래은 연출, 장호 무대·소품, 신동선 조명) 역시 당사자 극작의 진수라고 할 만하다. 한국의 한 섬에 사는 세상의 마지막 해녀 삼총사와 미국의 맨해튼 섬에서 정체성을 잃어가는 극작가 하영의 삶이 ‘맥락없이’ 오간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셀린 송의 자전적 이야기다. 마지막 해녀 90대 한솔(홍윤희 분), 80대 고민(박옥출 분), 70대 순자(이미라 분)는 평생 물질로 먹고살지만 자손은 바다 근처에도 못 오게 육지로, 해외로 보낸 게 유일한 자부심이다. 해녀의 삶을 박물관 관람객에게 설명하듯, CF 광고 찍듯 해양 생물 미니어처를 활용해 쇼처럼 보여주는 장면이 코믹하다. B급 정서의 코러스(이훤·경지은·양대은 분) 안무와 해녀의 집과 맨해튼 빌딩 숲을 오가는 트랜스포머 같은 대도구 활용이 특징적이다. 한솔의 손녀임이 밝혀지며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맨해튼 극작가 하영(백소정 분)의 삶이 주류 백인사회에 던지는 조소와 풍자는 비애와 폭소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컨선드 아더스>는 퍼포머가 직접 트레드밀 위에서 맹렬하게 달리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부지불식간에 시작돼 죽음으로 치닫는 중독의 속성을 상징하기도, 중독의 늪에서 탈출하는 것을 함의하기도 하는 중의적 퍼포먼스다. 퍼포머의 거센 숨소리와 호흡을 생생하게 전달해 중독의 심각성을 관객이 감각하도록 돕는다. <헌치백>에는 성적 묘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독서광이지만 중증장애인인 샤카에게 종이책은 무기에 가깝다. 왜 e북을 동시에 발간하지 않는지 알 수 없는, 세상의 무신경에 대해 섬세하게 지적하고 비판한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수명이 짧은 서로의 성격과 삶을 배려해 사랑의 기억을 리셋하는 것으로 덜 아픈 엔딩을 선택한다. 모더니즘 소설을 대표하는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더 구체적인 것이 더 보편적”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작고 사소한 이야기 안에, 인간 전체를 꿰뚫는 보편적인 삶의 진실이 담겨 있다는 의미다. 아쉽게도 네 작품 모두 서울 공연은 종료했다. <엔들링스>는 제주아트센터에서 6월 28일까지, <컨선드 아더스>는 광주 ACC에서 6월 29일까지 투어공연이 있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10월에 한국판의 여섯 번째 시즌이 시작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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